방을 비우면, 하얀 여백 드러나리니

[중국어에 문화 링크 걸기 143] 白

등록 2015.07.20 17:16수정 2015.07.2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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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백(白)은 밝은 해(日)에서 빛이 나오는 모양으로 희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 漢典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주인공 마속은 마량(馬良)의 동생이다. 마량은 또 제갈공명과 절친한 사이였으니, 친구의 동생을 군율을 어겼다고 참해야 했던 제갈공명의 심정은 그야말로 복잡했을 것이다. 읍참마속엔 군기를 되잡기 위해 사적인 인간 관계의 인연으로부터 마음을 비운, 대승적 결단의 고뇌가 서려 있다.

마속, 마량 형제는 모두 다섯인데 한결같이 재주가 뛰어났다. 그 중에서도 맏이인 마량의 재주가 가장 출중했는데, 그의 눈썹이 태어날 때부터 하얀 색이 섞여 백미(白眉)로 불렸고,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가 여기에서 생겨났다.

흰 백(白, bái)은 밝은 해(日)에서 빛이 나오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빛의 밝음에서 '희다, 맑다, 깨끗하다'의 의미가 생겨났다. 빛을 모두 반사하는 흰색의 성질에서 '헛되이, 공연히' 등의 뜻도 유추된 걸로 보인다.

흰색은 색깔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방위로서 서쪽을 나타낸다. 해가 지는 서쪽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장례식장에 갈 때 우리와 달리 흰색 옷을 입는다. 또 축의금은 빨간 봉투를, 조의금은 흰 봉투로 구분해 사용한다. 편백(扁柏), 측백(側柏)나무는 나뭇잎이 서쪽으로 주로 기울어 이름에 흰 백(白)이 포함되어 있다.

1917년 신문화운동 당시 문인들은 어려운 팔고문(八股文) 대신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쉬운 구어체로 글을 쓰자는 백화(白話)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하얀 말 운동'인 셈인데, 이리 저리 꼬아 어렵게 색을 덧씌운 글이 아닌, 형식과 격식의 치장을 벗은 쉬운 말의 글쓰기를 주창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백화운동을 주창한 문인들의 글을 살펴보면, 여전히 어려운 팔고문의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온갖 색으로 치장된 당시 문인들의 글이 일순간에 하얗게 탈색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번 물들인 천에서 색을 빼서 다시 하얗게 만들기 어렵듯이 한번 물든 언어와 관념의 세계 또한 다시 백지 상태로 되돌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채우는 것도 어렵지만, 비우는 것은 더 어렵다. 자기만의 색을 갖기도 어렵지만, 그 색을 없애고 원래의 백지상태로 돌아가기는 더욱 지난하다. 장자가 일찍이 제시한 해법은 방을 비워야 여백이 생기고 빛이 들어와 환하다는 '허실생백(虛室生白)'이다.


늘 뭔가를 채우기에 바쁘고, 더 큰 방을 구하기에 골몰하는 현대인의 생각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장자의 일갈이다. 흰색은 비록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색상이지만 역시 간단하지가 않다. 모두 비워야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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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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