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숙 구명운동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던 르포 '무등산 타잔의 진상'. 1977년 <대화> 8월호에 실렸으며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현장이 썼다.
오마이뉴스 이정환
하지만 박흥숙이 지적했듯 이것만으로는, "터무니없는 것들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했다. 박흥숙의 어머니도 이상한 사람이 돼야 했고, 아니, 그 마을 자체가 불을 질러서라도 없애야만 하는 요상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어야 했다. 실제로 당시 한 신문은 "무당의 아들이 제단을 차려둔 집도 태우려고 하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아예 그가 살던 마을이 무당촌이라는 보도도 난무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처럼 시내에 집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이곳에 무허가 움막이라도 짓고 살려고 온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산 좋고 물 좋으니까 굿을 한다고 시내 사람들이 올라와서 밥을 해달라고 하면 밥을 해주고 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 주면서 몇 푼 씩 받아 그것으로 먹고사는 것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결코 무당은 아니에요. 날품팔이죠." (박흥숙 어머니 심금순씨의 증언, 1977년 <대화> 8월호)박흥숙이 분노한 이와 같은 비열한 왜곡이 가리고 있던 진실이 그나마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 운동권 대학생의 르포 덕분이었다. 당시 조선대 공대 4학년이었던 김현장(66세, 현재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은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에 의문을 품고 직접 사건 현장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고 박흥숙의 일기 등을 발굴해 사실과 거짓을 하나 하나 가려냈다.
이 르포는 박흥숙 구명운동을 일으키는 결정적 촉매로 작용했다. 구명운동은 교회, 시민단체 등을 통해 번져나갔고,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서가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꼽히는 박순천 여사와 김옥길 여사(당시 이화여대 총장) 등 각계 인사 50여 명도 탄원 대열에 합류했다.
위인백 관장은 "(오른 손은 자신의 눈 근처, 왼 손은 자신의 가슴 근처에 두며) 이렇게, 탄원서가 쌓였었다. 보자기에 담아 법정에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며 "탄원서가 엄청나게 들어왔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법정에 가서 방청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 구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김대옥씨(사건 당시 광주 동구청 건축지도계)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이렇게 요약한다.
"(철거)집행을 하거나 집행을 당하는 가해자나 피해자는 전부 패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패, 패, 승이 되는 것이지. 국가만 승이 되고. 집행과 당하는 사람은 패, 패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일은 국가에서 안 해야죠."사형수는 알고 있었다, 눈물의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