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회] 육감이 이끄는 검, 무상검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74회]

등록 2016.07.15 13:38수정 2016.07.15 14:48
0
원고료로 응원
무영객은 척숭의 심장에 박힌 협봉도를 뽑았다. 이미 기도로 울혈이 빠져나간 뒤라 피가 솟구치지는 않았다. 이 자는 나의 눈길을 파악하느라 정작 나의 검을 보지 못했어. 무영객은 새삼 노인의 검이 무서워졌다. 노인이 이승을 하직한지 오래지만 그의 혼령은 끈질기게 자신의 영혼을 붙들어 맸다. 

노인에게서 검술을 배운지 삼 년이 지났다. 하루는 노인이 바구니에 동그란 구슬을 한가득 담아가지고 왔다. 구슬은 나무 재질이다. 가만히 보니 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는 염주다. 노인은 그를 마당 한가운데 세워놓고 그동안 배운 검무(劍舞)를 추도록 했다. 노인이 가르쳐 준 검무는 느린 것에서 빠른 것까지 다양했다. 그는 검을 들고 춤을 추었다.


무영객이 검을 아래에서 위로 죽 뻗더니 신형을 한바퀴 빙그르 돌리며 상하좌우로 검을 찌르고 베고 솟구쳤다. 은어떼가 호수에서 반짝이듯 검날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상장군 번쾌가 홍문의 연에서 춘 검무이옵니다."

그가 검을 멈춘 후 숨을 토하며 말했다. 이어 다시 검을 치켜세우더니 다시 춤을 추었다.

이번에는 먼 길을 가던 기러기가 강변 모래밭에 내려앉듯 사뿐히 움직였다. 가녀린 여인의 춤사위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검끝은 초서체를 쓰듯 부드러우면서도 길게 허공을 어루만졌다.

"초선이 여포 앞에서 춘 춤입니다."


그가 검끝을 아래로 향하고는 말했다.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하라는 의미다. 노인은 그에게 검무를 가르치며 고사(故事)를 덧붙였다. 춤 속에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통해 춤이 우러나왔다. 그는 고사의 내용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 노인이 꾸며낸 이야긴지 모른다. 다만 이야기가 있는 검무를 출 때 그의 검은 훨씬 신명이 났다.


그가 검끝을 아래로 향했다가 파압! 하고 숨을 뱉으며 공중으로 솟았다. 그는 제 자리에서 맴돌면서 검으로 원을 그렸다. 검을 빨리 놀리자 그의 신형을 에워싸고 막이 형성되었다. 검막은 휘황하면서도 두터웠다.

"자객 형가가 시황제를 추살하기 위해 춘 검무입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검은 더욱 빨라졌다. 그의 신형은 검흔에 가려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이때 노인이 말했다.

"너에게 날아오는 것을 막으며 숫자를 세어라."

노인이 염주 한 알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그를 향해 튕겼다. 염주는 화살처럼 날아갔다. 팅,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염주를 튕겨낸 것이다.

"한 개이옵니다."

그가 검무를 계속 추면서 말했다.

노인은 염주 두 알을 손에 쥐고 그를 향해 던졌다. 이번에도 그는 염주를 튕겨냈다.

"두 개이옵니다."

노인이 다시 던졌다.

"세 개이옵니다."

그가 말했다.

갑자기 노인이 염주를 한 움큼 집더니 그를 향해 던졌다. 염주 몇 개는 검에 맞아 떨어지고 몇 개는 그의 몸에 맞았다.

"소제(小弟), 이번에는 모르겠사옵니다."

그가 검을 내리고 노인을 향해 읍을 했다.

"이제부터 너에게 날아오는 구슬을 하나도 놓치지 말도록 하거라."

노인은 눈을 빠르게 하는 훈련이라고 했다. 두 계절이 흘렀다. 그는 검무를 추면서 노인이 던지는 염주의 개수를 스물 대여섯 개까지 파악했다. 이제 그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는 아무리 작더라도 그의 눈이 놓치지 않았다.

한 날은 노인이 던지는 염주 하나에서 피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소리가 난 염주를 집어 살펴보았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그를 향해 쏘았던 다른 염주에는 구멍이 막혀 있었다. 종이를 풀에 쑤어 구멍을 막아 놓은 것이었다.

"이제 소리를 세어라."

노인이 염주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노인이 던지는 염주는 어떤 것은 소리가 났고 어떤 것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스무 개를 던지면 소리가 나는 것이 두 개일 때도 있었고 열여덟 개일 때도 있었다. 노인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는 훈련이라고 했다. 그는 소리에 집중했다. 사 계절이 지났다. 그는 날아오는 염주의 개수와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어느 날 노인이 그에게 천으로 눈을 가리라고 했다. 그는 눈을 가린 채 날아오는 염주의 소리를 파악했다. 노인은 그에게 눈에서 벗어나는 훈련이라고 했다. 한 계절이 지나갔다. 그는 소리가 나지 않는 염주는 몸에 맞았지만 소리가 나는 염주는 모두 검으로 튕겨냈다. 

노인은 그에게 말했다.

"대결은 눈에서 시작하지만 승부는 눈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강호엔 열에 아홉은 물론이고 세칭 고수라는 자들조차 눈에 의존한다. 눈은 검술의 출발이지만 끝은 아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면 보이지 않는 것에 당하게 된다. 눈은 많은 걸 담고 있다.

투지와 의도가 그 안에 서려 있다. 검이 움직이기 전에 눈이 먼저 흔들리고, 검이 가기 전에 눈길이 먼저 향한다. 이걸 파악하면 상대의 공격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간혹 눈길과 검길이 다른 자가 있다. 그 자야말로 진정한 고수다.

그런 고수와 대결하게 되면 상대의 눈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눈길과 검길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장 확실한 건 일합을 겨루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합의 수에 네가 당할 수가 있다. 그러면 끝이다. 그러니 차선의 방법으로 파악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상대가 너의 눈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의 눈과 검을 일치시키게 된다. 불안하면 눈에 의존하게 된다. 그 다음은 실전에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더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날 따라 적운봉이 구름 위로 삐죽 솟아 자태를 드러냈다. 벽공의 하늘과 붉은 암벽이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노인이 마치 적운봉 같다고 느꼈다. 잘 드러내진 않지만 어쩌다 드러낼 때면 너무나 선명해 눈이 시린 모습. 그 날 따라 말이 많은 노인이 더욱 그랬다.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눈길에 속지 않기 위해선 청각을 다듬고 육감을 키워야 한다. 실전에선 청각이 의외로 유용하다. 청각은 속임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감이란 오감이 모두 합해지고 버무려진 상태에서 문득 솟아나는 감각이다. 아니 무념(無念)이다.

이 무념을 획득하면 검의 길과 눈의 길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의 육감이 이끄는 대로 검이 나아갈 때 그 검을 무상검(無相劍)이라고 한다. 눈앞의 상(像)에 매이지 않는 검이라는 뜻이다. 그 검 앞에선 그 누구도 눈으로 현혹하지 못한다."

"무상검 이후의 경지도 있습니까?"
"있다."
"그것은 무엇이라 하옵니까?"
"……."

노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주마!"

잠시 후 입을 연 노인의 짤막한 대꾸에 그는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자신의 쌀쌀맞은 답변이 미안했던지 앞서의 화제를 계속 이었다.

"무상검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단계다. 오로지 안력(眼力)의 빠름과 정확함을 추구하는 수준이다. 다음으로 보여도 보지 않는 단계다. 눈앞의 상에 미혹되지 않고 청각 등과 같은 다른 감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여러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때 이런 경지가 필요하다. 세 번째로 보이지 않아도 보는 단계다. 눈앞에 상(像)이 없어도 상대의 실체를 파악하는 경지다. 온 몸의 감각을 대상에 집중하면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된다. 어둠 속에서 대결할 때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네 번째로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는 단계다. 흔히 공격할 때는 적의 빈틈이 크게 보이고 수비할 적엔 자신의 빈틈이 크게 느껴진다. 마음이 작용하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상대가 보이는 것에 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의 허와 실을 볼 수 있다. 포정이 도끼날을 상하게 하지 않고 뼈와 살을 분리하듯이 말이다(주). 마지막으로 견(見)에서 벗어나 관(觀)을 통하는 단계다. 견이란 눈앞의 상(像)을 파악하는 것이고, 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꿰뚫는 것이다.

검을 예로 들면, 눈앞에 있는 상대의 검이 어떻게 움직이고 그 강약과 허실을 알아채는 게 견이라면, 관은 검의 형식 너머 그 이면에 무엇이 있고, 검을 작용하게 하는 힘의 원천을 보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이 입을 다물더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은 그에게 자신이 한 뜻을 알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노인이 입을 열었다.

"검의 이면, 그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제, 아직 검의 이면까지 알지는 못하옵나이다."

그는 송구스러운 듯이 답했다.

"검의 이면, 그 이면의 이면, 또 그 이면의 이면에는 상대의 마음이 있느니라. 관의 경지에 오른다는 건 상대의 심중까지 꿰뚫어 그 마음을 흔들 줄 아는 자이다."
"네가 방금 얘기한 다섯 단계를 깨우치겠느냐?"
"소제, 스승님이 말씀하신 경지에 오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너무 쉽구나."

노인의 표정이 엄해졌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소제는 지금 어느 수준에 도달했습니까?"
"네가 나의 검을 피한다면 삼 단계요, 나의 검을 막는다면 사 단계요, 나의 검을 물리친다면 오 단계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저기서 내 검을 받아보아라."

노인이 손가락으로 마당을 가리켰다. 그가 마당으로 가기 위해 노인의 곁을 물러나는 순간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장죽이 그의 머리를 내리 친 것이다.

"너는 나의 검을 피하기는커녕 보는 것조차도 못했다. 아직 일 단계구나!"

(주): 장자, 포정해우 고사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연재합니다.
첨부파일 크기 줄임 400.jpg
#무위도 7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AD

AD

AD

인기기사

  1. 1 '라면 한 봉지 10원'... 익산이 발칵 뒤집어졌다
  2. 2 "이러다간 몰살"... 낙동강 해평습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일
  3. 3 기아타이거즈는 북한군? KBS 유튜브 영상에 '발칵'
  4. 4 한밤중 시청역 참사 현장 찾은 김건희 여사에 쏟아진 비판, 왜?
  5. 5 "곧 결혼한다" 웃던 딸, 아버지는 예비사위와 장례를 준비한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