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회] 너는 정녕 내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76회]

등록 2016.07.20 13:46수정 2016.07.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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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칠의 아내는 부엌에서 요깃거리를 준비했다. 손님도 도적도 아닌 침입자가 저녁을 내놓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 대신 침입자들에게 잡혀 있다.

점심이 지나 나른해질 무렵 그녀는 밭에서 김을 매다가 등 뒤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껴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햇살을 등진 사내 둘이 장승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가만히 보니 덩치가 큰 사내의 등에는 웬 사람이 업혀 있다. 이윽고 덩치 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 아낙. 집 좀 빌려야겠어."

그들은 빌리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남의 집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뒤따라 들어가자 덩치 큰 사내는 등에 업힌 사람을 침상에 눕혔다. 그와 일행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구레나룻 부근에 가늘고 긴 흉터가 있다. 둘 다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흔히 말하는 강호인인 것 같았다.

산중의 촌부에게는 그들이 스스로 칭하기 즐겨하는 유협(遊俠)이든 혹은 협객이든 남의 일상을 제 맘대로 깨는 것에 있어선 도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집이건만 남의 집에 있는 것 마냥 떨리는 손을 마주잡고 구석에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가 남편은? 하고 짧게 물었다.

순간 남편마저 위험할까 싶어 멀리 가고 없다는 말을 할까 싶었지만 조동아리는 얄밉게 제 할 일을 먼저 해버리고 만다. 산막에 갔시유. 그럼 남편이 올 때까지 허튼 짓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 사내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렇게 남편이 올 때까지 감금인지 인질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모른 채 그들 곁에서 꼼짝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부엌에 있는 지금은 저들을 처음 대면할 때와 달리 무서움이 많이 가셨다. 남편과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저녁을 준비하라면서 검은 옷의 남자가 품에서 은화 두닢을 꺼내 자신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내일 장에 간들 은화는커녕 엽전 몇 개도 건지기 힘들 판인데 집에서 끼니를 차려주고 은화라니, 은근히 찢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진 맘먹고 씨암탉을 잡았다. 은화 두닢이 들어오는데 까짓 것 씨암탉이 대수랴, 내일이면 씨암탉 다섯 마리 정도 마당에 풀어놓을 수도 있는데. 그녀는 닭의 멱을 따고 채소를 다듬었다. 그녀의 손에 쥔 부엌칼은 검객의 손길마냥 바쁘고 예리해졌다.

담곤은 조복에게 수혈을 받은 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하더니 다시 정신을 잃었다. 산길을 내려오던 중 무영객은 조복에게 담곤이 차도를 보이려면 민가에 들러 하루나 이틀 정도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산 길에 화전을 일구는 외딴집을 발견하자, 그곳에서 회복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무지렁이 산골 아낙은 그리 놀라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다. 은화 두 닢을 던져준 덕분인지 닭까지 잡아서 저녁을 차려왔다. 식사 후 화전민 내외에게는 하룻밤만 헛간에서 지내라고 했다. 그들은 소처럼 눈만 끔벅이며 수락을 했다. 무영객은 다시 한 번 조복의 피를 담곤에게 수혈했다. 반시진이 지나자 담곤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더니 정신이 돌아왔다.

담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법도 했다. 자운헌에서 조복에게 칼을 맞고 만 하루 동안 출혈과 저체온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담곤은 무영객과 조복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흐흐, 영감, 고생은 이제부터야. 무영객은 속으로 웃었다. 그는 품에서 가죽보를 꺼내려다 도로 넣었다. 굳이 그럴 것까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과 공포를 확실하고도 직접적으로 인식시켜줄 수 있는 상처가 그의 몸에 있기 매문이다. 

마침내 담곤이 사태를 파악했는지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노부가 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소이다. 협객들은 대체 뉘시오?"
"닥치시오! 담장문인. 당신은 지금 체포된 몸이야."

조복이 소릴 질렀다. 강압적으로 나옴으로써 담곤에게 자신이 처한 입장을 알아차리라는 의도이다.

"허어, 내가 알기론 귀관은 금의위 위관이 틀림없소이다. 노부가 뭘 잘못했기에 이리 낯선 곳에 있는 것이오.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노부가 있을 곳은 이런 누추한 민가가 아니라 관청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담곤이 노련하게 되받았다.

"준목규운 담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무영객이 싸늘하게 말했다. 별호와 이름을 대는 것은 당신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반말을 하는 건 담곤에게 강호의 예를 갖추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담곤도 충분히 알아차릴 것이다.

"뭣이, 노부가 누군지 알고도 이런 예우를 한단 말이야!"

담곤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를 모르는가 본데, 알려주지."

무영객이 담곤에게로 가서 그의 허벅지를 냅다 걷어찼다. 

으악!

담곤이 통증으로 비명을 질렀다. 피딱지가 앉아 겨우 봉합된 피부가 다시 터져 피가 흘렀다. 무영객이 다시 한 번 가격했다. 담곤은 이번에는 비병을 지르지 않았다. 상처를 양손으로 잡고 끄응, 끄으응, 하는 신음 소리만 냈다. 담곤의 미간은 일자로 붙어버렸다. 타격 후의 저린 통증이 담곤의 전신을 훑어 내리는 모양이다.

그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통증을 견디느라 안간힘 썼다. 폭풍 같은 통증이 한차례 지나가자 담곤은 기진한 표정으로 숨을 헉, 헉, 내쉬었다. 잠시 후 분노가 담긴 눈길로 무영객을 올려다보았다.

"너,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담곤이 숨을 토하며 말했다.

무영객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곤을 내려다보았다. 이 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담곤의 별호와 이름을 대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시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늙은이는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고 반문한다. 공포를 일으킬 정도의 고통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군. 무영객은 담곤의 상처를 또 한 번 걷어찼다. 좀 더 세게. 

"으으윽, 너… 너는 정녕 내가 누군지 모르겠단 말인가?"

담곤이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

무영객은 담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를 심문해서 서생과 낭자의 행방을 추궁하려는데 이 자는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만 물어본다.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착각하고 있군,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좀 더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겠어. 무영객은 귀찮지만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의 손이 품안으로 들어갔다. 

무영객을 올려다보던 담곤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봐, 나는, 난 너의 의뢰인이야!"

담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품에서 가죽보를 꺼내던 무영객은 동작을 멈췄다. 담곤의 말을 이해하느라 잠시 멍해진 것이다. 의뢰인이라니? 그럼 이 늙은이가 어둠 속에서 나오던 기괴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란 말인가. 

무영객이 가만히 있는 걸 보자 담곤은 한숨 돌리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어떤 목소리를 내었다.

"보고하라!"
'……."

무영객이 반응이 없자 담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금 열관, 착수 전 삼 할, 진행하면서 삼 할, 완료 후 사 할."

담곤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변성술이라도 익힌 것 같았다.

무영객은 잠시 긴가민가했다가 감정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음조에 약간 쉰 듯한 성조에서 그가 접촉했던 의뢰인의 목소리가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자신과 약조한 계약내용이 정확하지 않은가. 음, 그러니까 준목규운 담곤이 나의 의뢰인이었단 말이지. 강호의 이목이 번다해 날 이용했단 말이지.

좋아, 이유야 어쨌든 나는 내 할 일만 하고 그에 따른 몫만 챙기면 되는 거야. 살수에겐 이유도 과정도 없고 오로지 결과만 있을 뿐이라고 노인이 말했지. 이 자가 준목규운 담곤이든 소림 장문인이든 나는 상관 안 해. 그가 나의 의뢰인이냐 아니냐만 따질 뿐이지.

잠자코 있는 무영객을 보며 담곤은 자신이 의뢰인이라는 걸 증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청명절 서호 습평, 단오절 금릉 모충연……."

무영객이 목소리에게 의뢰 받았던 건을 담곤이 정확히 짚어나가자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됐소이다. 노야를 나의 의뢰인으로 인정하겠소.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하는지 말해주시오."

무영객이 말했다.

"서생과 낭자, 즉 내 사질들은 숭산 묘적암으로 갔어. 일단 나를 낙양까지 데려다 주고 자네는 묘적암으로 가서 사질들을 데려오도록 하게. 아니, 진경의 소재를 파악하거나 입수할 수 있다면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오는 보름 경 내가 정하는 장소로 오게. 그동안 나는 낙양에서 상처를 치료할 터이니." 

담곤은 평상의 말투로 돌아가 차분하게 지시를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조복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제야 이해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시에 옅은 한숨이 자기도 모르게 나왔다. 자신은 무영객의 하수인이고 무영객은 담곤의 하수인이다. 결국 자신은 하수인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천하의 금의위 사방이란 직책이 우습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무렴 어떠랴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중원에 염증을 느껴 떠나는 마당에 의뢰인이 누구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할 바는 아니다. 다만 자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더 많은 몫을 가질 기회를 놓친 게 억울할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생길 것이다.

담곤은 무영객에게 황금 열 관을 주기로 했단다. 그 정도라면 담곤이 어마어마한 부자던가 아니면 자신의 전 재산을 걸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면 애초부터 기망(欺罔)의 의도가 있었거나. 아냐, 이들이 주고받은 말을 보건대 황금 세 관이 이미 착수금으로 지불한 상태 아닌가. 그러고 보면 담곤의 재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진경의 입수에 자신의 모들 걸 다 걸었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가 어떤 사유로 무공을 실전(失戰)했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인에게 무공의 실전이란 자신의 삶을 몽땅 잃은 것과 진배없을 터이다. 그가 진경을 입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는 건 거기에 실전된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복이 이 모든 걸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초옥을 나섰다. 아직 거동이 완전치 않은 담곤을 조복이 업었다. 초부로부터 다음날 작령장이 선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말을 사기로 했다. 담곤에게는 말보다 마차가 필요하지만, 조그만 읍이니만큼 구하기가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노출될 염려도 있다. 마차는 큰 성시(城市)에 가서 구하기로 했다.

초부 내외가 쥐꼬리만한 마당 덧문을 지나 산길 두어 마장까지 따라 나왔다. 침입자임에도 불구하고 초부내외에게는 마치 재백성군(財帛星君: 재물을 담당하는 신)이라도 배웅하는 표정이다. 무영객이 초부내외를 향해 돌아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초부내외는 무영객의 싸늘한 태도에 불편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황망해 두 손을 맞잡고 상체를 숙여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무영객은 제자리에 서서 초옥으로 들어가는 초부내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복이 흠, 하고 헛기침을 뱉으며 갈 길을 독촉하자, 무영객은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조복은 무영객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불쌍하다기보다 잘못된 인연을 탓해야겠지. 산중 짐승과 다를 바 없는 화전 인생, 악착같이 산들 무슨 영화가 있으랴. 조복은 담곤을 업고 소로로 들어갔다. 잠시 후 길이 돌아가는 구비에서 초옥 쪽을 바라보니 연기가 솟아올랐다.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는 무영객의 치밀함에 그는 잠시 진저리를 쳤다. 그가 준 은화는 도로 거두었을까. 조복은 궁금했지만 물을 생각은 없었다.

크엉,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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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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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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