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이희훈
추석이 끝나자마자 영양 부족으로 주사를 맞았다. 의사는 힘들더라도 철분 섭취를 위해 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란 감독에게 이는 쉽지 않다. 위가 없는 몸은 지방을 소화시키는 것이 버겁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다.
"위암 환자들은 설사할 각오 하고 먹는 거래요. 먹어야 소화 훈련이 된다고."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 등 사회성 다큐를 만들어 온 영상집단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은 5년만에 찾은 병원에서 지난 7월 초 위암 판정을 받았다. 위암 초기였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위와 림프절을 다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진행형이고 위치가 안 좋아서다.
의사는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됐는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위 상태를 보려고 수술 전 위 내시경을 했다. 하는 김에 대장 내시경도 했다. 대장에서도 암이 발견됐다. 위에서 전이된 게 아니었다. 다른 암세포였다. 몸속에 두 개의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었다.
위도 모자라서 대장도 절제해야 하는 건가. 막막했다. 짜증도 났다. 억울함도 들었다.
다행히 대장을 다 들어내야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시경 시술로 치료 가능한 수준이었다. 장은 절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김일란 감독은 기뻤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나는 왜 암 환자가 됐을까?'김일란 감독은 자신을 돌아봤다. 촛불집회, 밀양 그리고 세월호 참사. 현장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현장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용산참사 철거민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을 제작했다.
지난 몇 년간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연분홍치마는 김일란 감독을 비롯해 이혁상, 넝쿨, 변규리, 한영희 등 다섯 감독이 모인 영상 집단이다. 2004년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발족해, <마마상>,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공동정범>, <안녕 히어로> 등 사회성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제작했다.
5명의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한 사람이 작품 연출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조연출, 기획, 프로듀서, 촬영, 편집 등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13년간 공동작업을 해왔다.
연분홍치마는 다큐 창작 집단인 동시에 인권단체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인 곳, 투쟁 현장을 기록했다. 김일란 감독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책임자로서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 작업을 이끌어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이어진 촛불집회 영상을 기록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암에) 걸릴 법 하다.'모텔에 장기투숙하며 촬영..."다큐가 운동에 기여하는 방식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