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자 순으로) 원풍모방 방용석, 동일방직 이총각, 원풍모방 정선순, YH무역 최순영, 콘트롤데이타 이영순. 큰 사진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의 모습
민청련동지회
노협 사무실은 일반 빌딩이 아니라 서울 신길동의 연립주택 한 칸을 구입해 입주했다. 당시 연립주택은 일반 단독주택에 비해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원풍모방 노조가 탄압으로 쫓겨나면서 남아 있던 조합비로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의 많은 활동가들이 이곳을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중에는 김근태 의장을 비롯해 민청련 활동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협의 창립과 공개적인 활동은 당시 운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한 평가를 받았다. 기본 계급 혹은 기층민중인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근태 의장은 이 노협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부문들이 결합하는 방식의 연대 틀을 구상했다.
'민민협'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다다른 부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농민이었다. 흔히 '1천만 농민, 8백만 노동자'라고 하던 때였으므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농민운동은 기독교와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보호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가톨릭농민회가 그것이었다.
지식인 단체로는 해직언론인들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있었고, 문화운동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출판계와 연극계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늘 운동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각 부문운동을 망라하여 연합체를 만들기 위해 김근태 의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는 동아투위의 이부영이었다. 이들은 단체의 이름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약칭 민민협)'로 정하고, 참가 자격은 개인이 아니라 각 부문운동을 대표하는 자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1984년 6월 29일 오전 9시, 서울 돈암동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상지회관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년 전, 민청련이 창립총회를 가졌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함세웅 신부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진행되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창립을 선포하는 '민중민주운동선언'은 발기인을 대표해 이부영이 낭독했다.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과 민중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온 우리들 민주, 민중 운동단체 대표"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란 바로 이전과 같이 사회적 명망이 있는 개인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 명성은 적더라도 각 부분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운동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민민협의 대표위원은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세 사람이 맡았는데, 김승훈과 김동완은 성직자였으므로 아무래도 대외활동에 소극적이어서 사실상의 대표 역할은 이부영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성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근태는 서기를 맡아 출범 후에도 각 부문 간 협력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창립한 민민연은 민청련과 가까운 서울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8·15민족해방기념식을 민청련 등과 함께 치러냈다. 그리고 10월에는 독자적인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