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민청련동지회
1985년 3월 29일, 분도빌딩에서 통합 결성대회가 열렸다. 기존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중앙위원 1백여 명이 참석한 회의는 "2·12총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여 범민주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족통일운동의 지속적 전개를 위해 두 단체가 조건 없이 통합할 것"을 결의했다.
이렇게 결성된 민통련의 정체성은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운영하는 단체"였으며 "지도적 민주 민권 운동가를 포괄하면서 전국적 지부 형성을 통해 국민적 대표성을 획득해 나갈 것"이었다. 특히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과는 구별되는 순수 재야 양심세력의 결집체"라고 규정했다.
지도체제는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와 김승훈 신부를 선출했다. 이렇게 보면 민통련은 민민협과 국민회의 중 국민회의에 보다 가까운 조직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 명망가들이 갖는 여론 파급력을 더욱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통련은 활동의 원칙을 민중노선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즉 "민중의 구체적 삶의 문제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을 조직화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통련은 출범 뒤 분규가 발생한 노동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주력했다. 당장 6월에는 인천에 있는 한일스텐레스 공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자 계훈제 부의장과 방용석 노동자복지협의회 대표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현장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구사대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민청련은 민통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실제 활동에서 서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운동 지원활동 등은 함께하는 일이 많았고, 구성원 개인 사이의 관계도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당면 정세가 단체들 사이에 균열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9월 20일 열린 민통련 2차 통합대회에서는 민청련, 기독교계 단체들, 서울노동운동연합,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 11개 단체가 가입하여 민통련은 명실상부한 통합단체가 된다.
5월 투쟁에서 '야사'를 뜬 이범영1985년 5월은 민청련이 창립 뒤 두 번째 맞이하는 '광주항쟁기념의 달'이었다. 이번에는 총선 승리로 인한 자신감에서, 보다 과감한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집을 제작해 대중을 상대로 배포했다. 아울러 단순히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정권을 직접 공격하는 가두시위 투쟁을 민청련이 학생운동과 연대해 실행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누가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것인가를 두고 민청련 내부에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회원들 대다수가 학생운동 시절에는 '야사를 떴던' 경험이 있었다. '야사'란 야전사령관의 약자로 시위의 초기에 대중 앞에 주모자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청련은 공개된 단체이고 그 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인인 형편에서 쉽사리 구속을 각오할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