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녹차밭에 모인 '간첩'들 "나 여기 잘 살아 있소"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⑨] 잊힌 역사는 반복된다

등록 2019.05.04 11:46수정 2019.05.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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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역에 내린 사람들
순천역에 내린 사람들지금여기에
 
"매번 가자고 했는데 이제야 99칸 정씨 고택을 보는구나."

용산에서 순천행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일행의 마음은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신났다. 봄꽃 흐드러진 남도의 녹차 밭을 상상하니 들뜬 마음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들. 기다리고 있었네 그래."

순천역에 도착해 승강장을 나오니 미리 순천역에 도착한 박우용이 환히 웃는 얼굴로 일행을 반긴다. 박우용은 납북어부로 단식농성까지 해 남한으로 돌아왔지만, 10년이 지난 어느 날 수사기관에 이유 없이 체포돼 고문, 폭력 등을 당하고 조작 간첩으로 징역을 살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14년,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그를 고문하고 간첩으로 조작했던 형사의 양심고백과 사죄, 정보기관의 협박에 못 이겨 거짓 증언을 했다는 증인들의 자기 고백 덕분이었다. 

멀리 홍성에서 살고 있지만 탁본 모임 사람들이 보성 나들이를 한다는 말에 부인과 함께 차를 타고 순천으로 내려온 박우용. 불편한 다리에도 지난 겨우내 스키장 등을 다니며 몸 관리를 했다는 그의 말에 사람들은 연신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렇게 오랜만에 본 얼굴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며 그들은 역전 식당가로 향했다. 

"이렇게 다니니 얼마나 좋아!"
 
 순천역 앞에서의 점심식사
순천역 앞에서의 점심식사지금여기에

평일 낮이었지만 역사 안팎과 식당가는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붐볐다. 서울에서 입고 내려온 두꺼운 외투를 벗은 김순자씨는 이렇게 밝은 해 아래 서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누구 눈치 안 보고 이렇게 다니고 싶은 곳 돌아다니는 게 자유 아니겠어요?"라는 그녀의 말이 새삼 밝게 느껴졌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으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진다'는 걱정부터 '아프다고 집에만 있으면 더 처지니까 이렇게 만나고 돌아다니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긴 시간 이동하느라 피로가 쌓였음에도 노년의 참가자들은 걸어 다니는 것 하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선생님, 다리가 안 좋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괜찮으셔요?" 
"내가 며칠 전부터 걱정했는데 웬 걸, 오늘 일어나니 다리가 가뿐한 거야. 이렇게 지팡이 없이도 걷는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셔 내가 계속 쫓아다닐 테니." 


식사를 마친 일행은 보성녹차 밭으로 이동했다. 정씨 고택에 가기 전 녹차 밭 구경을 하고 싶어서였다. 1시간 정도의 이동 길에서 일행은 정숙항씨의 가족사와 정씨 고택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또 기막혀했다. 특히 삼척간첩단 조작사건으로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고초를 겪었던 김순자씨는 삼척간첩단 사건과 보성간첩단 사건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지난해 떠난 동생 김태룡 생각에 더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김태룡씨 역시 이전부터 피해자들과 함께 보성에 오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고초를 이겨낸 힘에서 비롯된 유머 감각

보성의 한 녹차 밭에 내린 일행은 입구를 지나 삼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삼나무를 보고 연신 감탄하며 나무를 만져보는 일행에게 박우용씨는 갑자기 이리로들 와보시라 외쳤다.

"이 나무 봐요. 이거 껍질이랑 안의 속을 손으로 비비면 배에 구멍 난 데 때우기 제격이야."

박용우씨는 오랜 세월 배를 탔던 어부답게, 그 당시 배에 있을 때 이 나무로 빈 곳을 때운 기억을 실감 나게 이야기했다. 그에게 있어 배는 어떻게 보면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다. 명태 조업을 하다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고, 돌아와서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배를 건조했지만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7년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와 보니 배도 집안 살림도 모두 파탄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매번 피해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그의 유머 감각은 지난 고초를 이겨낸 그 자신의 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나무 길을 지나니 드넓은 녹차 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들은 "텔레비전서 보던 게 이거구나" 하며 가지고 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녹차 향을 맡아보려 고개를 숙였다.

"이런 데선 공기만 잘 쐬고 가도 보약이야"라는 최양준의 말에 돌연 걷다가 심호흡하기를 수차례, 녹차 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보이자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냥 찍기보다 한 손을 들고 찍자는 말이 나와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여기 있어요!"라는 의미라고 했다. "나 여기 잘 살아 있소"하는 외침처럼 말이다.

"이런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녹차밭에서 손흔드는 참가자들
녹차밭에서 손흔드는 참가자들지금여기에
 
녹차 밭을 뒤로 하고 정씨 고택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문 뒤에 다시 큰 중문이 나타나는 구조에 놀라고, 집 뒤를 둘러싼 석축이 3백년도 더 되었다는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특히 복역 시절 정숙항씨의 아버지 정종희씨와 같은 광주교도소에 머물렀던 최양준씨는 고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눈은 머셨어도 걸음걸이 자세 하나가 바르던 분이셨어."

최양준씨가 과거 기억 속의 아련한 정종희씨를 떠올리고 있을 때, 다른 일행들은 정숙항씨에게 다가가 99칸이었던 고택의 건물이 왜 몇 채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로 남았느냐고 물었다. 정숙항씨는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가산을 내놓으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또 해방 전후로 갖은 고초 속에 고택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정숙항씨의 말에 일행은 절로 고개를 숙였다.

"참 그래... 우리가 예전에 겪은 고통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처럼 이런 사실도 잘 알려지질 않으니 모를 수밖에. 이 집안 자식들이 너무 고생했겠어."
 
 탁본-정씨 고택의 대문
탁본-정씨 고택의 대문지금여기에
   
 탁본-정씨 고택의 서고 문
탁본-정씨 고택의 서고 문지금여기에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진다. 탁본모임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고통과 마주하고 우리 사회가 이들의 비극을 개인의 비극이 아닌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이해하고 고민하기를 바라는 데서 출발하였듯이 역사에서 묻힌 사실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기억은 망각될 것이고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소헌에 웃음이 머물다 
 
 웃음이 머무는 회소헌
웃음이 머무는 회소헌지금여기에
 
"선생님들 먼 곳까지 내려와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우리 선생님들이 여기 오신 게 저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 감옥에서 저희 아버지를 보셨던 분들이잖아요. 다들 억울하게 고생하셨고 그 자체로 저는 아버지가 여기 계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정씨고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바로 '회소헌'이다. 보성 나들이를 제안한 정숙항씨가 태어난 곳이자 정종희, 정숙항 부녀가 살았던 집인 이곳에서 그녀는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일행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말로만 듣고 오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었던 기억을 들었다"며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운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집의 현판과 마찬가지로 웃음이 머물고 있었다.

다음날 정숙항씨가 다녔던 초등학교이자 봉강 정해룡씨가 만들었던 양정원의 후신인 회천서초등학교에서 일행은 예전부터 있었다는 벚꽃 나무 아래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다시 올 기회를 기다리며 또 오늘의 이 순간을 기억하며 말이다.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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