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남편의 취미에 불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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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의논해 왔다. 바로 이직하지 않고 몇 달 동안 쉬면서 재충전 기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의 휴식에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맞벌이로 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퇴직금과 나의 수입만으로도 몇 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매일 아침 출퇴근하느라 고생했으니 푹 쉬라고 선뜻 말했고, 그는 얼마 후 퇴사했다. 그리고 한이라도 맺힌 듯 눈 떴을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초반 며칠은 나도 그 마음이 이해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 채 하고 싶은 것만 온종일 하고 싶은 기분을 왜 모르겠는가. 다만 그 '아무것도'에 나와 밥을 먹거나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 게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참으려 노력했다. 그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게임 그만 좀 해'라고 말하는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는 각자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할 수 있을 만한 성인이기에, 나는 그에게 무슨 이유로든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잔소리를 한다는 건 내가 우리 집안의 '책임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정의 컨트롤타워가 되어 모든 살림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체크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구성원을 등 떠미는 게 바로 '잔소리하는 사람'의 역할 아닌가.
결혼 후 잔소리를 듣는 쪽이 더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지만, 사실 듣는 사람은 살던 대로 살면 그만이다. 즉, 엄마의 돌봄을 받기만 하는 '자식' 역할에 계속 머물면 그뿐이라는 뜻이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입으로 불평하며 시키는 일만 할 수 없이 하는 건 쉽다. 내 자식도 아닌, 다 큰 배우자를 훈계하고 달래고 채찍질해서 가정의 균형이 잡히도록 만드는 역할이 훨씬 골치 아프다.
그리고 결혼 후 그 골치 아픈 일을 도맡는 쪽은 한순간에 '어른'이 된다. 배우자가 여전히 자식의 역할에 머물고 싶어 할 때, 상대방은 반강제로 어른이 되어 그의 부모(사실상 엄마)가 하던 살림의 책임을 이어받아야 한다. 적성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겠지만, 누군들 결혼을 통해 배우자의 부모가 되고 싶을 리 있을까? 알아서 하겠지, 그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기다리려고 노력했다.
게임하는 남편에게 화를 낸 이유
내가 차라리 출근이라도 하면 나을 텐데, 하필 프리랜서라 집에 있는 시간이 길다. 남편이 매사를 미뤄두고 게임하는 모습을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카페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와도 여전히 컴퓨터 앞에 붙어 있는 그를 발견하는 일이 지속되자 슬슬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결국 그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카페에 나와 거의 2주 만에 같이 마주 보고 앉는 것 같았다. '네가 일을 쉬는 동안 나와 함께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적어도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고 퇴사 전만큼만 가정 내 역할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동의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카페에서 나와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뒤, 남편은 또 잠들기 전까지 3시간 넘게 게임을 이어서 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바로 2차 회동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대화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저놈의 게임기, 갖다버려!"
내가 결혼하고 남편의 취미 생활을 못 하게 막거나 화를 내는 아내가 될 줄은 몰랐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한 그에게 화가 치미는 한편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함께 밀려왔다. 그의 자유를 속박하는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는 마음과, 이렇게 혼자 게임하며 살고 싶었으면 왜 결혼했느냐는 마음이 함께 밀려들었다.
게임을 두고 한참 옥신각신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정말 버려?"라고 시무룩하게 물었으나 게임기를 버린다고 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게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자꾸 요점에서 멀어지는 말다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나는 그가 내 바람을 가뿐히 무시하고, 나와의 공동생활 역시 내팽개쳐둔 채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상태가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우리의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자리를 무책임하게 비워놓을 때, 그래서 관계의 균형이 위태로워질 때, 그리고 그가 우리의 공동생활에 소홀해질 때, 즉 나와 결혼하며 맺은 수많은 (실질적, 감정적) 약속이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나는 게임하는 남편을 미워하게 됐다. 그가 게임에 몰입해 나와의 일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결혼에도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