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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에 근거한 이 표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일제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1156만 8천 석이었다. 산미증식의 결과로 이 양은 1928년에 1729만 8천 석이 됐다. 1912년에 비해 49.5%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으로 판매된 양이 1912년에는 291만 석, 1928년에는 740만 5천 석이다. 154.5% 증가한 것이다. 쌀 생산량은 49.5% 증가한 데 반해, 대일 판매량은 3배 이상이나 증가한 것이다.
그럼, 증가된 생산분만큼만 일본으로 넘어간 것일까? 1912년과 1928년을 비교하면, 증산분만큼만 넘어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12년에는 1156만 8천 석이 생산되고 1928년에는 1729만 8천 석이 생산됐다. 461만 6천 석이 증산된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넘어간 쌀은 1912년 291만 석, 1928년 740만 5천 석이다. 449만 5천 석이 더 넘어간 것이다. 이것만 보면, 대일 판매량의 증가분이 증산량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다른 연도들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간 해들이 발견된다. 1912년과 비교할 때, 1929년에는 194만 3천 석이 증산됐지만 대일 판매량은 269만 9천 석이 증가했다. 1930년에도 증산량보다 많은 양이 넘어갔다.
식량을 수탈당했다는 점은 한국인의 쌀 섭취량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표에 따르면, 1912년에 1인당 연간 0.772석이었던 1인당 섭취량이 1929년에는 0.446석으로 떨어졌다. 쌀이 증산됐는데도 섭취량은 줄어든 것이다.
쌀을 강제로 빼앗겼다는 점은 한·일 양쪽의 섭취량을 비교해보면 더 잘 드러난다. 쌀 생산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섭취량은 매년 1석이 안 되지만, 일본인의 소비량은 1석을 넘겼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선총독부 농림국이 작성한 <조선 미곡 요람>만으로도 이런 참담한 실상이 드러난다.
위 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한국인의 참담한 실상은 한반도 거주 한국인과 일본 거주 한국인의 식생활 차이에서도 표출된다. 농림성 같은 일본 정부 자료를 분석한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식생활의 지역성과 식민지성'(고려사학회가 2019년 발행한 <한국사학보> 제75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주식은 전체적으로 쌀만을 섭취하는 경우는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보리 및 다양한 잡곡을 혼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중 약 30%는 1년 내내 육류·생선·계란 등의 어떠한 동물성 단백질도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한국에서 쌀이 생산되는 데도 한국인 87%는 쌀을 제대로 먹지 못한 데 반해, 일본에 가서 노동 일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은 달랐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재일 조선인은 주식으로 백미를 섭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최하층이었지만, 쌀을 구입해서 쌀밥을 지어먹었다."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살기 힘든 이들이었다. 조선에서 이들은 쌀을 먹는 13%에 끼지 못했다. 이들이 속한 쪽은 1년 내내 동물성 단백질을 먹기 힘든 계층이었다. 그런데 이들도 일본에 가기만 하면, 돈을 아무리 적게 번다 해도 일년 내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생산한 쌀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넘쳐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아일보> '조선 쌀을 막지 말라' 기사의 실체
하지만 이영훈 교수는 그것을 수탈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반일 종족주의>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과서의 서술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누군가가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한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가만히 참고 있을 농민도 없겠거니와, 그것이 곧 신문에 보도될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쌀 수탈을 묵인하고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바보라는 것인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글이다.
그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되지 않았겠느냐고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이 지금의 언론처럼 보도의 자유를 누렸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쌀 증산량에 비해 한국인 섭취량이 줄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때문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말한다.
"생산량에서 수출량을 빼고 수입량을 더해서 구한 국내 소비량은 정체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1인당 쌀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쌀 섭취량이 감소한 것은 수탈의 결과가 아니라 인구증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식민지 한국 내부에서 책임 소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인식인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언뜻 보면 총독부에 유리한 것 같지만, 실상은 불리하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겠다고 들어온 총독부가 한국인 인구증가도 고려하지 않고 쌀 정책을 결정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쌀의 대일 유출을 조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무책임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수탈할 의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쌀 섭취량이 감소한 원인을 인구증가로 돌린 뒤, 이영훈 교수는 1931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 '조선미 이입제한엔 절대 반대'를 거론하면서 화제를 전환한다. 조선 쌀의 유입으로 피해를 본 일본 농민들이 조선미 유입을 반대하는 현상을 거론하면서, 이 기사는 '조선 쌀을 막지 말라'는 항의의 의견을 내보냈다. 이 기사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