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대회
권우성
뉴전연은 최초의 뉴라이트 단체가 아니다. 뉴전연보다 1년 전인 2004년 11월 23일 자유주의연대가 뉴라이트 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이후 교과서포럼·뉴라이트싱크넷·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료와사회포럼·시민들과함께하는변호사모임·한국기독교개혁운동·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등이 속속 출현했다. 뉴라이트재단은 전국연합 출범 7개월 뒤인 2006년 6월에 등장했다.
신우익은 미국에서는 '네오콘(neocons)'으로, 일본에서는 '신우요쿠(新右翼)'로 불린다. 뉴라이트는 이것들과 같은 의미다. 뉴라이트로 불리게 된 계기에 관해 2008년 9월호 <신동아> 기사 '자만·과욕·혼돈 신(新)권력 뉴라이트'는 "한기홍 뉴라이트재단 상임이사에 따르면 뉴라이트란 명칭은 이동관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장(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최홍재씨와 함께 술자리에서 만들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생긴 뉴라이트란 표현을 뉴전연 설립자들이 조직 명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뉴전연은 같은 시기에 등장한 동종 단체 중에서 가장 큰 두각을 보였고, 자유주의연대와 더불어 뉴라이트의 한 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내세운 최고 이념은 '자유주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계화를 외치며 등장한 자유주의의 업그레이드판인 '신자유주의'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재벌기업 친화적인 신자유주의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자유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개인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권리를 존중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두 축으로 하여 성립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말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강자인 재벌기업에 유리한 논리다. 경제적 약자의 자유와 경제적 강자의 자유가 충돌하면 약자의 자유는 약자의 굴종으로 변모한다. 약자와 강자의 자유경쟁은 결국 약자의 굴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창립선언문에 '두레·품앗이·계 같은 공동체주의로 자유주의를 보완하겠노'라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공동체 자유주의는 시장이라는 자원배분 기제의 효율성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시장 기능을 통해 공동체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동체주의로 시장 기능을 보완하겠다고 선언해 놓고, 시장 기능을 통해 공동체주의를 실현하겠다고 말하는 모순을 범한 것이다.
약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국가 같은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시장의 기제' 즉 시장주의 시스템인 자유경쟁에 의해 약자들이 보호받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주의가 사실상 무의미해지게 된다.
이는 뉴라이트의 이념이 실상 '올드라이트'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뉴'를 떼고 '라이트전국연합'으로 불러도 됐던 것이다.
뉴라이트는 '이명박 당선'을 위해 존재했다
뉴전연을 포함한 뉴라이트 단체들이 2005년을 전후에 대거 등장한 것은, 1997년 대선에 이어 2002년 대선에도 패배한 데 따른 보수세력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창립선언문에서 뉴전연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연이은 좌파의 집권으로 대한민국의 우파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왔다"고 한 뒤 "언제까지 우파는 지난 60년간 피땀 흘려 이룩한 눈부신 성과를 좌파에게 강탈 당한 채 침묵해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
선언문에서 말한 '피땀 흘린 우파'는 올드라이트를 말한다. 올드라이트가 상실한 권력을 운동권 출신인 자신들이 탈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선언문에도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의 긍정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있다.
뉴전연의 출현은 어느 정도는 신선했다. 낡은 보수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보수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기대감은 이들의 급성장으로 연결됐다. 위 <신동아> 기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대중 조직화를 추구한 결과 2년여 만에 회원을 17만 명으로 늘렸다"며 "전국 시·군·구에 200여 개 조직을 건설했고, 종교·교사·기업인·문화체육·노동·의사·학부모·대학생 등 17개 부문조직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