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재향군인회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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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군이 민간단체이기보다는 관변단체였다는 점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1일의 창립총회 풍경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해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재향군인회 발족'은 이렇게 보도했다.
"병무국을 비롯하여 예비역 장정들과 구(舊)한국장교단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립총회는 예정대로 작(昨) 1일 상호 십시 병무국 광장에서 허 국무총리서리와 김 국방차관 이하 삼군 장성 그리고 내외 유지(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바 ···."
국방부 병무국 마당에서 허정 총리서리 및 김일환 국방차관과 육해공군 장군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가 열렸다. 순수한 민간단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2006년에 <군사논단> 제46호에 실린 정길호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논문 '재향군인회 운영 현황과 발전 방향'은 이렇게 말한다.
"본래 재향군인회의 설립 목적은 국방부 병무행정의 집행을 보조하는 예하 단체로서 예비역 장교들이 지역 내 징병 대상자와 기타 예비역 해당자를 관리하여 동원체제에 만전을 기하는 데 있었다."
예비역 장교들을 통해 징병 대상자와 예비역을 관리하는 것이 이 단체의 설립 취지였다. 병무청 보조기관 같은 단체였던 것이다. 그 같은 실질적 설립 취지를 가진 상태에서 이 단체는 여러 차례의 통합과 해체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1953년에는 제대장병보도회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대한상무회로 개칭됐다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4일 원래의 명칭으로 되돌아갔다.
이 단체를 법인으로 만든 것은 민주당 정권인 장면 내각이다. 1961년 5월 10일 제정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법률 제617호)은 제2조 제1항에서 "재향군인회는 법인으로 한다"고 한 뒤 제7조에서 "정부예산의 범위 내에서 재향군인회에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8조에서 "국방부장관은 징집, 소집, 방위훈련에 관하여 재향군인회의 협력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 이 법률은 향군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했다. 제2조 제2항에서 "본법에 의하여 설립된 재향군인회 이외에는 재향군인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친목 단체에 대해 이처럼 독점적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비역 장교 못지않게 예비역 병사들의 복리 증진에 힘쓰겠다며 2005년 9월 27일 출범한 평화재향군인회가 법외 단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향군을 보다 강력한 단체로 만든 것은 위의 법률 제617호가 제정된 지 6일 뒤 새벽에 야음을 뚫고 서울 사대문 내에 침입한 박정희 쿠데타군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3년 7월 19일 법률 제617호를 전면 개정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법률 제1367호)을 통해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을 재향군인회 회원으로 만들었다.
법률 제617호의 제3조에서는 "다음 각호 규정에 해당하는 자는 재향군인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한 데 반해, 법률 제1367호의 제5조는 "재향군인회의 회원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로 한다"고 하면서 병역의무 이행자들의 종류를 열거했다.
'될 수 있다'에서 '한다'로 바뀜에 따라, 병역의무를 이행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재향군인회의 당연직 회원으로 간주됐다. 2016년 개정된 현행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 역시 문장만 약간 다를 뿐 법률 제1367호와 동일하다. 오늘날 '1000만 재향군인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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