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대선 때 후보로 등록한 조봉암·신익희·이승만. 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런데 투표 열흘 전, 신익희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호남 가는 열차 안에서였다. 그해 5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대통령후보 신익희 선생 급서'는 이렇게 보도했다.
"전주에서 정견을 발표하고자 4일 하오 10시 서울역을 출발한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5일 상오 4시 15분 강경-논산간 동(同)열차 속에서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켜 동 5시 30분 이리역(지금의 전북 익산) 도착 즉시로 하차하여 호남병원에 입원·가료하였으나 동 5시 45분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
심장마비사로 발표됐지만, 대중은 믿지 않았다. 국민들은 이승만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이런 분위기는 신익희에 대한 국민적 애도로 연결됐다.
싸늘하게 변해버린 그의 유해가 특별열차(당시 표현은 특별기동차)에 실려 서울로 향하는 동안,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수많은 국민들이 기차역은 물론이고 기찻길에까지 나와 통곡을 하며 애도를 표시했다. 라디오도 많지 않았던 시절에 수많은 국민들이 신익희 서거 소식을 신속히 전해듣고 기찻길을 지켰던 것이다.
유해가 도착한 서울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역도 인산인해였다. 그해 5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신익희 선생 유해 안착'은 이렇게 보도했다.
"고 신익희 씨의 유해가 말없이 환도하는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역은 마중나온 군중들로 차서 혼잡을 이루기 시작하여, 동(同) 3시에 가까워오자 서울역 프랱홈은 발 디딜 곳조차 없이 인파를 이루고, 간단없이 흘러나오는 곡성과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아우성은 서울역 밖까지 들려나왔고, 프랱홈으로 들어가려던 군중은 서로 밀리어 2등 대합실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유리창을 파괴하고 홈 안으로 쇄도하였다."
신익희에 대한 추모와 이승만에 대한 분노였다. 이것은 5월 15일 투표 당일에 유권자들이 특이한 방식으로 저항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투표 용지에는 신익희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신익희 란에 기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역대 대선 사상 최고의 무효표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무효표 속출은 언론과 민주당의 홍보에도 상당 부분 기인했다. 언론과 민주당은 이 선거를 신익희에 대한 '추모 투표'로 바꾸고자 했다. 그해 5월 13일 자 <경향신문> 기사 '추모투표는?'은 "신씨에게 한 표를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라는 독자 최아무개의 질문에 대해 "결국에 가서는 무효가 되고 기권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되지만, 자기의 (의사)표시는 되는 것이지요"라며 무효표를 은근히 부추겼다.
갑작스레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이 분위기를 이승만에 대한 공격 수단뿐 아니라 진보주의자 조봉암에 대한 공격 무기로도 활용했다. 신익희 서거로 조봉암과 이승만만 남은 상황에서 민주당은 '우리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며 '무효표도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시'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민주당은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조봉암 대신 '신익희'를 찍도록 유도했다. 진보주의자 조봉암 앞에서만큼은 민주당도 자유당과 한편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입장에서는 조봉암한테 표가 가느니 차라리 무효표가 많이 나오는 편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제3대 대선의 무효표 현상은 이승만에 대한 항의 표시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조봉암에 대한 견제라는 점에서는 또 다른 측면을 띨 수 있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때문에 경찰 조사 받은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