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한국현대사>의 저자, 박세길 작가
손우정
1981년의 대학은 바로 1년 전 광주의 참혹한 실상이 퍼져나가며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조직 사건이 여럿 터지고 주모자라 규정된 몇몇이 칠성판에 끌려 올라갔지만 분노를 식히지는 못했다. 대학은 학생운동의 열기로 펄펄 끓어올랐고 시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박세길은 다른 동기들이 그랬듯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제적 처분 끝에 군대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운이 좋았다. 동기들은 녹화사업(전두환 정부가 입대한 학생운동 출신 신병을 프락치로 활용해 학생운동 와해를 노린 공작 사건)으로 고통 받았지만, 그는 입대하자마자 크게 다쳐 1년 만에 의병 제대를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 그 역시 인천에서 노동현장 투신을 준비했다. 그 와중에 아끼던 후배 이재호가 전방입소교육 반대를 외치며 신림동에서 분신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5일 후, 1년 뒤에 다가올 6월항쟁의 서곡이 된 5.3인천항쟁이 일어났다. 1986년의 봄이었다.
"인천항쟁 직후에 일어났던 대대적인 검거열풍 속에서 잡혀갔는데, 당시에는 재호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어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가 문제였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국현대사 관련 자료를 구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맥이 잡히더라고요."
당시 구치소에서는 집필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어렵게 구한 볼펜심으로 우유팩의 껍질을 벗겨 한국현대사의 내용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우유팩 50개 분량의 원고가 작성되자 당시 구치소에 어마무시하게 끌려와 있던 양심수들이 첫 독자가 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장 많이 읽힌 역사책 중 하나임이 분명한 <다시쓰는 한국현대사>(이하 다현사)가 탄생한 순간이다.
다현사와 함께 한 15년, 다현사와 결별한 10년
10개월의 옥살이 끝에 사회로 나온 박세길은 자신이 정리한 현대사를 팸플릿으로 만들어 돌려보다 아예 책으로 출판하기로 한다. 흥행은 감옥 안에서 검증되었다고 믿었지만 찾아간 출판사마다 퇴짜를 놓았다. 주장이 너무 세고, 이런 책을 내놔봐야 읽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출판사 사장에게 무릎을 꿇다시피(정말 꿇었을지도 모른다) 매달려 겨우 승낙을 받았다. 단, 조건이 있었다. 원고료 대신 인세로 받으라는.
"당시에는 책을 팔아도 수익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먹고 살아가려면 인세보다 원고료를 받는 게 유리했어요.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잘 팔리지도 않을 책이라고 보고 원고료라도 아낄 요량으로 인세 계약을 한 거죠. 그 때 원고료를 받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겠죠.(웃음)"
통사정까지 하면서 힘들게 낸 책은 출판되자마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3권짜리 역사책은 어느 대학, 어느 동아리방을 가도 꽂혀 있는 필독서가 됐다. 이쯤되면 세속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팔렸고 얼마나 벌었을까?
"지금은 출판사들이 몇 쇄 나갔다고 정확히 기록하지만, 당시에는 세금문제 때문에 몇 권 팔렸는지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인세 들어오는 거 보면서 '엄청나게 팔렸구나' 짐작만 했죠. 액수요? 글쎄...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사고 결혼한 후에 10년 동안은 먹고 살았으니까요. 여러 단체에 후원도 좀 했고."
이산하 시인과 박노해 시인이 필명으로 시를 쓰다 잡혀갔던 시대, 실명으로 책을 낸 박세길은 오히려 책 때문에 잡혀간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책은 각종 공안사건에 증거자료로 자주 등장했고 이적표현물이 됐다. 그렇지만 압수해갈수록 잘 팔렸으니 서점에서는 계속 책을 들여 놓았다.
이후 그의 인생은 '다현사와 함께 한 10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운동이 새로운 사회를 불러올 핵심 동력이라 믿었던 그는 노동자 역사학교를 조직해 현대사 강좌를 열면서 철도와 완성차 노조 조직화에 열정을 쏟았다.
90년대 말에는 소위 586세대가 여권으로 쭉쭉 빠져나가고 덩그러니 남아 있는 사회운동 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에 들어가 정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2000년대를 맞이하고 조금씩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90년대 내내 강좌 중심의 노동자 교육활동에 주력했어요. 절대 노조를 만들 수 없다는 철도와 기아차에서도 제 강좌를 들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데 성공했어요.
그런데 2000년대 들어가서 보니까, 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대공장 노동자들은 이미 기득권이 된 것 아닌가 싶었고. 환경은 디지털 혁명이니 뭐니 하고 급변하고 있는데 우리 콘텐츠는 예전 그대로고. 저 조차도 이제 '다현사'와 결별해야할 때가 왔다고 봤어요."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우선 버려야 했다. 2007년 9월 13일, 그는 몸담았던 조직을 스스로 떠나 치악산으로 들어가 홀로 2년을 보냈다. 그리고 2008년, 그 고민의 결과를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이라는 책으로 모아 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책 내용에 90년대 북의 경제위기를 분석한 부분이 있는데, 이게 국가사회주의의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했어요. 위기 상황에서 국가만 쳐다보고 아무 것도 못했다고. 여기저기서 변절했다, 전향했다는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그런데 사실 이건 북한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던 것들이었어요. 그만큼 우리 안에 관성이 크게 남아 있을 때였죠."
더 시간이 흐르자 민중운동도 많은 것이 변했고 그를 변절자라 비난했던 이들 중에서도 생각을 바꾼 사람이 여럿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