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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맥주는 도대체 무슨 맛으로 마셔?"
"시원하고, 쌉쌀한 맛으로 마시지."
"에이, 그냥 쓴맛이네. 그런 걸 왜 마셔."
"그런 말 마. 너 애기 때 맥주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머니 생전에 명절날 가족들이 모이면 가끔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아마 그 말씀을 꺼낼 땐 아버지께 조금 서운한 일이 있던가, 그냥 이유 없이 아버지가 미울 때였던 거 같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 친구분에 대한 얘기다.
그 당시 아버지는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했던 20대 한창 시절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가끔씩 친구들 모임에 어린 나를 데리고 나가곤 하셨다. 내 나이 세, 네 살 즈음이었다. 그렇게 어렸던 날 큰 걱정 없이 데리고 다닐 수 있었던 건 밖에 나가서도 그 또래의 아기들에 비해 유독 내가 얌전히 놀았기 때문이다. 또 바나나 우유만 사주면 보채는 것 없이 한두 시간은 혼자 놀곤 했다고 했다.
그런 친구 아들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너무 귀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유독 아버지 친구분 중에 내게 술을 먹이려고 애쓰셨던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가 귀엽고, 예쁘다고 하면서 뽀뽀를 가끔 강요(?)했었고, 종종 술이 취한 날 자신의 입에 들어있던 술을 내 입으로 밀어 넣기도 해서 어머니께서 많이 미워했던 친구분이었다. 만일 내 친구가 내 자식들에게 그런 행동을 했으면 아마 그 친구와 한바탕 크게 싸우고, 손절까지 생각했을 듯싶지만 아버지는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었는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아버지 친구들 모임에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날 모임에 가서 아버지 옆에서 한동안 얌전히 놀고 있었던 난 어디가 불편했는지 친구분들과 얘길 나누던 아버지에게 자꾸 칭얼댔다고 했다. 바나나 우유를 주고 나서도 한동안은 짜증 섞인 투로 아버지를 신경 쓰이게 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 조용해져서 아버지는 친구들과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아버지는 날 보게 되었고, 바로 옆에 있어야 할 친구 대신 떡하니 내가 앉아서 조금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아버지에게 연신 말했다.
"브라보~, 브라보~!"(내 기억이 아닌 어른들의 말이라서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그제야 아버지는 자리를 비운 친구 자리에 있는 비어있는 맥주잔을 봤고, 조금 전까지 채워져 있던 맥주잔이 누구 입으로 들어갔는지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을 했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브라보'를 연신 외치던 난 아버지 뒤에 금세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고, 아버지는 어머니께 혼날 걱정에 계획보다 빨리 모임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귀가했다고 했다.
그 일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 명절 때 가족들끼리 술자리만 하면 어머니 입에서 회자되었고, 그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자리를 피하던가 입을 닫고 시선을 피하셨다. 이렇게 내 첫 음주는 믿거나 말거나 네 살에 시작이 되었고, 40년을 훌쩍 넘는 음주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런 전통 아닌 전통은 우리 딸아이에게도 이어졌다. 내가 30대 중후반일 때 난 일도 많았고, 직장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면 맥주 한 잔이 늘 그립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 시절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맥주를 마셨고, 세 살이었던 딸아이에게는 아빠가 항상 마시던 맥주 맛이 늘 궁금했을 듯싶다.
그날도 난 퇴근하고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10시 시간대에 나오는 TV 드라마를 딸아이와 함께 보고 있었다. 세 살 밖에 되지 않았던 딸아이는 내가 10시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나와 함께 얌전히 앉아서 TV를 봤고, 그때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그렇게 딸아이와 TV를 보며 맥주를 잔에 따라놓고 조금씩 마시던 난 딸아이가 내 맥주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꼈다. 살그머니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맥주잔에 넣었다 빼서는 입에 가져가는 것을 곁눈질로 봤고, 한번 저러고 씁쓸한 맛에 말겠지 싶어 맥주에 빠졌던 손을 입에 넣을 때까지 그냥 모른 체했다.
하지만 딸아이는 내 생각과는 달리 입으로 가져갔던 손을 다시 맥주잔에 넣었고, 이렇게 두세 번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는 냉큼 마시던 맥주잔을 치웠다. 씁쓸해하는 표정과는 달리 딸아이는 말리지 않았으면 계속 맥주를 찍어 먹을 듯했고, 그렇게 딸아이도 나와 비슷한 나이에 술맛(?)을 알게 되었다.
종종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하는 일에 대해 더욱더 흥미와 위험하지만 매력을 느끼며 더 열심히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심리를 '청개구리 심리' 혹은 '반대 심리'라고도 한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해보았겠지만 이런 청개구리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습성이자, 본성인 듯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종종 느껴왔었다. 이런 습성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인간 본연이 갖고 있는 습성이므로 강약이 존재할 뿐 유무가 있지는 않은 듯하다.
난 아이들에게 '무엇을 하지 마라', '무엇은 해야 한다', '공부해라', '열심히 해라'와 같이 반대 심리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는 편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해주는 것도 있지만 강요해서 생기는 부작용을 잘 알기에 가급적 아이들의 자율 의지를 신뢰하는 편이다. 물론 인생을 먼저 살아본 선배로서 가이드나 조언은 필요에 따라서 해주지만 그래도 아이들 인생에 중요한 결정에는 앞으로도 깊이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다.
무언가 결과를 기대하고 대하는 교육 철학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내 믿음이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끔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있어서 고마운 건 숨기고 싶지 않은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살면서 이런 내 마음이 흔들리고,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가서 후회하더라도 지금은 아이들을 믿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고 싶다. 지금처럼 아이들도 웃고, 이런 아이들을 보며 나도 웃는 날들이 좋다. 이런 오늘이 좋다.
당신의 집 아이들도 웃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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