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 총리(재임 1972~1974).
일본총리실 공식 누리집
개발우선주의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먼저 '한물간 이념'으로 배척당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재임 1972~1974)의 실패 사례가 이 점을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 독도를 마주보는 니이가타현(도쿄 서북쪽)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다나카 가쿠에이는 '20세기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통한다. 그의 입지전적 출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케 한다.
부모의 직업이 자녀에게 세습되는 일이 잦은 사실상 신분제 사회에서, 다나카는 부모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소학교 졸업 뒤인 15세에 상경해 토건회사 사환, 무역회사 직원, 잡화상 점원 등을 거친 그는 25세 때인 1943년에 다나카 토건공업을 설립했다.
이렇게 축적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는 정치권에 진출했다. 28세 때인 1946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그는 평화헌법이 공포된 뒤인 이듬해 4월 25일 선거에서 당선했다. 생애 총 16선의 정치경력은 이렇게 시작했다.
중의원 건설상임위원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그는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내각 때인 1957년 39세 나이로 우정대신이 되고, 1972년 7월 자민당 총재에 이어 총리대신이 됐다. 54세였던 이때 그는 '일본열도 개조론'을 선전하면서 총리직을 시작했다.
'일본열도 개조론'은 그해 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제목이다. 이 책은 7월 이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해 7월 12일 치 <조선일보> 기사는 "다나까 새 일본 수상의 저서 <일본열도 개조론>이 동경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화제"라고 보도했다.
금방 식은 '일본열도 개조론' 열풍... 투기의 부상
일본열도 개조론은 1955년 이후의 고도성장기에 태평양벨트로 집중됐던 일본의 경제력을 여타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태평양벨트는 일본열도 중간쯤인 도쿄와 부산 남쪽인 규슈섬을 잇는 라인에 조성된 네 개의 공업지대를 말한다. 규슈섬 북쪽인 기타큐슈 지역, 고베·오사카 쪽인 한신 지역, 나고야 쪽인 주쿄 지역, 요코하마·도쿄 쪽인 게이힌 지역이 그 네 곳이다.
다나카는 태평양벨트에 몰려 있는 공업 시설을 여타 지역으로 이전하는 한편, 대도시 주택난 해소를 위해 인구 25만~30만 명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교통망을 대거 확충해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통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외침은 일본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동맹관계인 박정희 정부가 한국에서 유신체제를 선전하던 시기에, 다나카 내각은 이렇게 열도개조론으로 국민들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봄에 한국 언론에서 '고전한다'는 평이 나왔을 정도다. 열도개조론이 일본을 변화시킬 수 없음이 증명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나카 내각의 지지율 추락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1973년 5월 23일자 <조선일보> 기사 '고전하는 일본열도 개조'는 이렇게 짚는다.
"다나까 정권은 작년 7월(원문은 6월) 역대 내각 가운데서 가장 높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 발족했다. 그러나 그 내각이 1년도 채 못 되어 이제 역대 내각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없는 내각으로 전락했다. 벌써 정계의 일각에서는 '다나까 정권 단명설'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최근 일본 주요 신문들이 조사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나까 내각의 지지율은 전국적으로 26%이지만, 동경에서는 20%를 하회하는 19%."
책 <일본열도 개조론>이 많이 판매된 도쿄에서 지지율이 더 낮게 나타났다. 위 기사는 "다나까 정권의 간판인 일본열도 개조론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함을 국민이 인지했을 때 그들의 실망은 컸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과소(過疎)과밀의 폐해를 해소함으로써 물가고·공해·주택난·지가폭등을 없앨 수 있다는 그의 지론은 현실과는 먼 하나의 비전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지론은 일본열도를 멍들게 했다. '전 국토를 고속도로의 망으로 묶어 대도시 집중의 산업을 분산, 균형 잡힌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던 계획은 오히려 토지가격 폭등을 초래했고, 서민들의 꿈인 마이홈마저 짓밟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일본 국민 상당수가 피해를 봤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내 집 마련의 꿈'이 무너지는 피해였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다 손해를 봤던 건 아니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공장 신축, 신도시 건설, 교통망 확충이 추진되는 속에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 있었다. 토건업체들이 바로 그들이다. "부동산 업자가 71, 72년도 전국 고소득자 랭킹에서 수위를 차지한 것은 열도 개조론의 허구성을 증명했다"며 "그의 위대한 꿈은 일본 역사상 볼 수 없었던 토지투기 붐을 일으키고 말았다"고 <조선일보> 기사는 전한다.
다나카의 끝은 좋지 않았다. 불법 정치자금이 폭로돼 1974년 12월 9일 사퇴한 그는 1976년 2월에는 유명한 록히드 사건의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사가 다나카 등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항공기 판매의 편의를 얻으려 한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위상은 계속 추락했다. 결국 그는 뇌경색으로 투병하던 1993년,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개발주의의 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