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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에게 답하는 편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38회] 형식은 편지이지만 내용은 우리나라 문장의 역사를 꿰뚫는 '문장통사'라 하겠다

등록 2021.04.08 17:48수정 2021.04.0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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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나무위키
 
조선시대 학인(문인)들의 교류(유) 방식 가운데 편지(서한)를 통한 길이 가장 많았고 또한 유효했다. 일상적인 문안편지에서부터 학술논쟁에 이르기까지 다채다양했다. 소통 방식이 달리 없었기도 하지만, 정성이 담긴 육필 편지는 학인들의 멋이고 맛이었다.

「답이생서(答李生書)」는 이생의 편지를 받고 답신하는 글이다. 형식은 편지이지만 내용은 우리나라 문장의 역사를 꿰뚫는 '문장통사'라 하겠다. 발췌한다. 

우리나라는 바다 구석에 치우져 있어서 당나라 이전의 문헌은 아득해서, 비록 을지문덕과 진덕여왕 같은 시를 사가들이 옮긴 것이 있지만, 과연 그들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차마 믿기지 않소.

신라 말기에 이르러 고운 학사 최치원이 비로소 그 명성이 대단했지마는, 이제 그를 볼 것 같으면, 문은 변변치 못해 시들하고, 시는 껄끄러워 나약해서 허빈(許彬)과 정곡(鄭谷) 중간이라 해도, 또한 그 꼴이 추하니, 곧 성당의 시와 그 바자로움을 잴 수 있으료.

고려시대에 정지상은 한 면모를 넉히 엿볼만하나, 또한 만당 중의 농염하고 기려함에 걸맞고, 이인로와 이규보가 자못 청신하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며, 진화(陣澕)와 홍간(洪侃) 또한 푸짐하고 곱기도 하나, 그래도 모두 장공 소식(蘇軾)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따름이오. 익재 이제현에 이르러 번창함이 비롯되어, 가정 이곡(李穀)과 목은 이색(李穡) 부자가 그 뒤를 잇고, 포은 정몽주와 도은 이숭인과 척재 김구용 등이 말기의 명가로 치오.
 
 
 '국조시산', 허균이 엮은 시선집. 1706년에 간행된 목판본
'국조시산', 허균이 엮은 시선집. 1706년에 간행된 목판본한정규
 
조선 초기에 접어들어 삼봉 정도전과 양촌 권근이 문명을 홀로 떨치었으니, 문장은 이에 이르러서 비로소 통달했다고 할 수 있고, 그 갈다듬음이 빛나서 크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소. 그래서 중흥의 공은 문정 이색이 크다 하겠소. 

중간에 문간 김종직이 포은 정몽주와 양촌 권근의 실마리를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라고 이르지만, 다만 글의 수준이 높지 못한 것이 한이요. 그 뒤는 용재 이행 재상의 시가 신묘한 경지에 들었고, 신광한과 정사룡도 또한 놀랍다 하겠소. 그 뒤에 소재 노수신이 또한 떨치기에 힘썼으니, 이 몇몇 분들은 중국에 태어났다 해도 어찌 강해(康海)와 이몽양(李夢陽) 두 시인에 뒤진다 하료.  

오늘날 문을 업으로 하는 이 가운데서는 동고 최립을 추천하고, 시로는 익지 이달을 추천하니, 이들은 모두 천년 이래 뛰어난 가락들이요. 그리고 친구들 가운데서는 여장 권필이 매우 아름답고 밝으며, 자민 이안눌이 깊고 굳건한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 


보내온 편지에 최경창과 백광훈 두 분은 당시(唐詩)의 기풍이 있다고 했는데, 또한 명가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그 경계가 좁은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오. 말하는 바의 아계 이산해와 제봉 고경명은 내가 아직 그 전집을 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으료. 바야흐로 형조에서 의논이 있다 하고, 재촉함을 당하여 매우 바빠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오. 얼굴을 다시 대할 날이 있을 것이요. 갖추지 못하고 이만 줄이오. (주석 11)


주석
11>  이병주, 『고전의 산책』, 357~360쪽, 민족문화문고 간행회, 1985.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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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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