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9세 이상 만 39세 이하의 청년, 신혼 부부등에게 공급하는 서울시 주택 정책인 역세권 청년 주택 정책이 최근 난항을 겪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반대 민원이 잇따르자 서울시 구처장 협의회는 서울시에 제도 개선을 건의했고 서울시는 4월 역세권 청년 주택 사업 추진시 초기 검토 단계에서 주민 의견을 청취하도록 했기때문이다. 청년 주택을 반대하는 이유로 고밀도 개발, 면학 분위기 방해, 슬럼화, 주민들의 휴식권을 위협 등을 들고 있지만, 임대 주택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도 있다.
1930-1950년대 영국 옥스포드에 있었던 컷슬로(Cutteslowe) 벽 이야기를 임대 주택과 관련되어 해볼까 한다. 벽. 벽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그 용도는 다양하다. 집안에 있는 벽은 거실, 부엌, 화장실등 기능을 분리하고 방 벽은 개인의 공간을 만든다. 성벽은 외부 침입으로부터 성내 재산과 인명을 보호할 목적을 가지고 있고 국경은 국내법이 적용되는 구역을 표시한다. 베를린 장벽의 경우는 적대적 이데올로기의 유입을 막았다. 약 2미터 높이의 벽돌 벽에 철조망까지 위에 있었던 컷슬로 벽은, 경제적 계급에 따라 중상류층과 저소득층으로 옥스포드 시를 갈랐던 경우다.
컷슬로 벽이 생긴 배경은 20세기 초 영국의 주택 부족이다. 산업 혁명의 종주국으로 영국은 산업 혁명의 영광을 빨리 누렸지만 그만큼 그늘도 빨리 찾아왔다. 19세기에 걸쳐 폭증하는 도시 인구로 도시 주택 부족은 심각해졌고, 이 문제는 특히 노동자 및 저소득 계층에서 두드러졌다. 이에 영국은 지방 정부가 주택 단지를 개발해 소유권을 갖고 낮은 월세로 저소득층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정책을 도입한다. 1919년 데이비드 조지 (David Llyod George) 자유당 (Liberal Party) 내각내 보건부 장관 크리스토퍼 애디슨 (Christropher Addison, 1869-1951)이 마련한 법을 시초로 하여 이후 임대 주택 정책은 계속 다듬어지고 확대되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와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야 하는 1930년대 초, 옥스포드 시는 시가 소유한 부지에 임대 주택을 지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는 클라이브 색슨의 도시 주택 회사 (Urban Housing Company)가 중산층을 위한 주택 단지를 조성하고 있었다. 개인 사업가 색슨은 임대 주택이 들어서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슬럼" (임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때문에 그가 만든 집이 팔리지 않거나 집 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 색슨은 두 거주지를 물리적 공간에서 분리할 의도로 벽을 쌓았다. 컷슬로 벽이 개인 소유 주택과 임대 주택 사이의 길 한복판에 세워졌기 때문에 양쪽이 사용할 수 있는 도로와 버스 정류장까지 분리되었다.
평소 사용하던 길이 끊기자 임대 주택쪽 주민들이 옥스포드 시에 청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고조되는 비판에 옥스포드에서 활동하던 영국 공산당 소속 아베 라자러스 (Abe Lazarus)는 1936년 지역 주민 시위를 계획, 당시 약 2천명의 주민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라자러스는 몇몇 지지자들과 같이 곡괭이를 들고 벽에 올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경찰에 막혔고 벌금형을 받았다.
계속되는 시민 운동과 청원에 1938년 6월, 이번에는 옥스포드 시정부가 직접 공사용 롤러로 벽을 무너뜨렸다. 회사는 옥스포드시를 즉시 고소했고 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벽이 있는 땅의 소유주가 개발 회사였고, 당시에는 공권력이 개인 소유 토지에 간섭할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법원의 강한 질타 속에서 옥스포드 시는 컷슬로 벽을 제 손으로 다시 세워야 했다. 이후에도 이 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계속되었지만 허사였다. 심지어 2차 대전 중에 군사 훈련 목적으로 탱크가 지나갈 길을 터주기 위해 전쟁부 (the War Office)가 이 벽을 무너 뜨렸지만, 결국 다시 세워 주었다.
누가 봐도 비이성적이고 '정의롭지' 않은 벽이었지만 사적 재산권이라는 법에 막혀 속수무책이었던 컷슬로 벽이 마침내 무너진 것은 1959년 3월이었다. 전후 도시 계획 일환으로 정부 권한을 강화할 필요가 있던 영국은 1953년 정부가 강제로 개인 땅을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법으로 규정했다. 이 법령에 의거하여 옥스포드시는 컷슬로 벽이 세워져 있는 땅을 강제 구입했다. 1959년 3월, '컷슬로 벽 무너뜨리기' 운동의 첫 세대 활동가의 아들이자 옥스포드 시재산 위원회 (City Estate Committee)의 위원장이던 에드먼드 깁스 (Edmund Gibbs)가 직접 벽에 올라가 곡괭이로 벽을 쳤다. 시정부와 2차대전기 전쟁부도 무너뜨리지 못했던 컷슬로 벽이 25년만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계층에 따라 거주지를 분리했던 컷슬로 벽은 옥스포드 시의 흑역사다. 옛 이야기로 잊혀질만했던 이 악몽은 2019년에 다시 소환되었다. 21세기 초 런던은 전 세계에서 집 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였다. 감당할 수 없는 주거 비용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 정부는 개발업자가 주택 지구를 개발할 때 자유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주택을 60%로 국한, 40%는 임대 주택 혹은 '지불 가능한' 주택 (Affordable housing, 처음에는 정부와 소유권을 공유하지만 갚으면서 지분을 늘리는 형태)로 짓게 했다.
사건의 발단은 런던 남부 람베스 (Lambeth) 지역의 개발 지구로, 개발 회사는 법적 요구 사항인 공공 임대 주택과 자유 시장 주택을 같이 지었다. 하지만 임대 주택 부분을 위한 놀이터와 자유시장 주택을 위한 놀이터를 따로 설정했다. 원래 계획은 놀이터에 문을 달아 출입을 자유롭게 할 예정이었지만, 개발 허가를 받은 후 디자인을 수정, 실제로는 나무 숲으로 만들어 출입을 막았다. 임대 주택이야 아니냐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분리된 셈이었다. 물론 임대 주택 놀이 공간이 더 작고 시설도 빈약했다. (2019년 3월 26일 가디언, <왜 그들은 와서 놀수 없나? : 런던의 주택 분리 ('Why can't they come and play?': housing segregation in London)>) 이후 유사한 경우들이 계속 보고되자, 런던시, 보수-노동 양당의 개입으로 '벽'에 의한 놀이터 공간 분리는 금지되었다.
패트릭 멀레넌(Patrick Mulrenan)은 놀이터 분리 사건이 영국 사회 계층이 20세기 컷슬로 벽처럼 물리적인 벽으로 분리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그는 21세기 주택 정책에는 정부의 "중산층의 힘"에 대한 기대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공간적·사회적으로 섞였을 때 저소득층이 중산층의 사회·문화적 자본을 공유하고 중산층이 저소득층에게 경제적·문화적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기대다. 보수-노동 양당 모두 이 방식을 지지하지만, 이 기대에 등을 돌리는건 중산층이라고 멀레넌은 꼬집는다. 중산층이 다른 계층과 섞이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심지어 중산층은 티나지 않게 저소득층과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임대 주택 (social housing) 분리의 오랜 역사>, 잡지 <<British Politics and Policy>>).
우리는 어떨까. 평범한 젊은 세대가 영혼까지 끌어와도 살 수 없다는 집, 그리고 부족하나마 그들을 위해 세운 임대 주택 정책, 그러나 인근 주민들 반대에 지연될 것으로 보이는 정책. 이 엇갈리는 이해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고 돌파구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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