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기도의 호수중산간지대 새미오름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화구호를 정비해 나무를 심고 묵주기도를 하며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호수로 조성했다.
황의봉
2018년 3월 제주로 완전히 이주해 낯선 환경에 적응해갈 무렵 뜻밖의 뉴스를 접했다. 성이시돌목장을 개척하고 오늘날 이곳을 가톨릭의 성지로 만든 주역이라 할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다. 2018년 4월 23일로 이주한 지 1달 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임피제 신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장례미사나 추모행사에라도 가볼 생각을 했을 텐데,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제주도의 진정한 위인을 보내드리는 뜻깊은 현장을 놓치고 만 것이다.
제주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이시돌목장 일대를 가끔 찾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궁금증이 커갔다. 특히 올해 초부터 성이시돌복지의원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하게 되면서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피제 신부에 관한 책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주지역 도서관에는 없었고, 교보문고를 검색해보니 절판됐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의 생애
그러던 중 얼마 전에야 비로소 임피제 신부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됐다. 제주대 양영철 교수가 인터넷신문 '제이누리'에 격동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이었다. 이 연재물을 통해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1928-2018) 신부, 이제는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이 더 어울리는 한 가톨릭 사제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했던 고귀한 생애를 엿볼 수 있었다.
1954년 성골룸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26살 젊은 신부가 첫 부임지로 제주에 도착했다. 6·25와 4·3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 제주는 폐허를 딛고 일어서느라 안간힘을 쓰던 시절로,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다. 임피제 신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요즘 말로 맨땅에 헤딩해야 할 처지라고나 할까. 한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지만 성당 건물이 없어 신자들의 집과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려야 했다.
한림성당을 짓게 된 스토리부터 극적이다. 임피제 신부가 한림에 부임한 그해 미국 화물선이 한림 앞바다에 좌초한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군이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물자 수송용 배로, 9천 톤짜리 대형화물선이었다. 레이더 고장으로 방향을 잃어 한림 앞바다에 있는 큰 암초에 부딪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화물선 선원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할 생각으로 배에서 내려 마을로 찾아왔다. 외국인 신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임피제 신부를 찾아갔으나 목재와 돈이 없어 성당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들이 신부에게 제안했다.
"배 안에 좋은 목재들이 많다. 배가 좌초하는 과정에서 목재가 유출된 것으로 보고하겠으니 3일 후 선박조사단이 오기 전에 목재를 가져다가 성당 건축자재로 써라."
당시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20여 명에 불과했는데, 한림 읍민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배에서 목재를 날라다 주는 '기적'이 일어났다. 400~500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와 손과 손으로, 어깨와 어깨로 목재를 날랐다. 4일 동안 마차로 100대분이 넘었다. 지금의 한림성당은 나중에 다시 지었지만,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