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관(1910년 경)모화관을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개수 작업을 거쳐 독립관으로 삼았다. 현판을 왕세자가 내린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재필은 신문을 발판으로 독립협회를 창립한다. 협회에는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전·현직 고위관료가 다수 포진한다. 또한 모화관을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협회는 창립 상징으로 독립문 건립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독립은 여러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농후한 한계를 드러낸다. 명백하게 청일전쟁 전후처리 시모노세키조약에 근거한 '청나라로부터 독립'이다. 이는 곧 일본으로 예속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람 차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 유공자'라 칭송한 독립신문 기사(1898년 8월 20일자)가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들이 말하는 독립을 여실히 드러낸 논조로 아연 실색케 하는 짧은 글이다. 협회 간부 3인이 용산까지 마중 나가 이토를 영접(8월 25일자)하고, 그가 경성학당에서 행한 연설을 싣기(8월 30일자)도 한다.
물론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1896년 6월 20일자)을 통해 독립문의 상징이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를 비롯하여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서재필은 비판점이 있는 대상이다. 갑신정변 때 자신으로 인해 죽은 부모 묘소는 물론 일가친척의 만남 요구까지 거절한다. 그의 정체성은 '미국인'이었다. 서재필은 친러 수구파와의 대립으로 중도에 추방되는데, 누군가 이를 만류하자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해 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에게 조선은 단지 '귀국'일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좀 가혹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2만 8800원을 받아낸다. '중추원 고문'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계약한 기간이 10년이다. 잔여 기간 7년 10개월 급료 2만 8000원과 여비 800원을 요구한다. 뒤에 미국이 있다. 조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같은 서재필의 행보에 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위협을 맹렬히 성토했다. 때문에 두 나라는 공히 서재필을 제거 대상으로 여긴다. 그가 겪은 이러한 생명 위협에 미국 국적이 일종의 '방패'가 되어줬다는 주장이다.
또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가족들 묘소를 찾기가 괴로웠을 수도 있고, 이미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 교리에 충실한 입장에서 유교적 사고와 행동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 더불어 미국식 '계약'에 충실한 사고방식은 당연하게 중추원 고문이라는 잔여 계약의 이행을 요구했을 개연성 또한 존재한다. 이렇듯 대립하는 양가성(兩價性)이 서재필의 본 모습이다.
성금모금운동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자 학생들이 협성회를 조직, 이 회를 중심으로 독립과 민권, 개혁을 위한 토론회가 활발해진다. 이는 독립협회로 확산되어 나중에 만민공동회로 이어진다.
입지가 넓어진 서재필은 신문을 통해 조선이 '입헌군주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성은 1896년 7월 내정개혁 단행 의지로 표출되기도 한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왕이 아관에 있어 독립 명분이 미약한데다, 친러 수구파들이 환궁을 주장하며 전제정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배후에는 절대로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는 고종이 도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