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애 무덤 주위 풍경애월읍장이 세운 표지석이 놓여 있고, 주변엔 밭이 펼쳐져 있다. 표지석 뒤에 조정철의 추모시가 새겨졌다.
황의봉
이들의 이야기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출셋길이 트인 것 같던 사대부 조정철(1751∼1831)이 1777년 정조 시해 음모 사건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되면서 시작된다. 무고를 당했다는 억울함과 절해고도에 유폐된 외로움,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땅에서 겨우 연명하며 살아야 하는 곤궁함 그리고 죄인을 감시하는 눈길.
27세의 나이에 기약 없이 고달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던 조정철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향리의 딸 홍윤애(?∼1781). 감시가 심한 중죄인의 적소에 남몰래 드나들며 조정철을 뒷바라지하는 비바리(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하는 처녀) '홍랑(洪娘)'이 바로 그 천사였다. 연극에서는 빨래도 해주고 식사도 챙기다가 조정철에게 천자문을 배우기도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귀양살이 양반이 측은해 도와주려는 제주도 처녀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청춘남녀이기도 했다. 연민으로 시작한 윤애의 헌신적 도움은 '몰래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1781년 2월 조정철이 유배된 지 4년 만에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난다. 축복은커녕 그 존재를 숨겨야 했던 유배 죄인의 딸은, 홍랑의 언니에게 맡겨 애월읍의 한 절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딸이 태어난 다음 달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해왔다. 김시구는 남인 출신으로 노론인 조정철 집안과는 대대로 정적인 관계였다. 반대파의 씨를 말릴 생각으로 김시구는 조정철의 죄를 찾아내려 온갖 수단을 부렸다.
끝내 조정철의 죄를 찾아내지 못하자 김시구는 홍윤애를 붙잡아 가혹한 추궁을 해댔다. 조정철이 유배 죄인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느냐, 임금이나 조정 대신을 비방하지 않았느냐며 고문을 했다.
그러나 홍윤애는 단지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잔일을 거들어줬을 뿐이라며 김시구의 계략에 말려들기를 거부했다. 김시구는 뜻대로 되지 않자 유배인 거처에 출입했다는 죄를 물어 곤장 70대를 치며 홍윤애를 초주검에 이르게 했다. 마침내 홍윤애는 딸을 낳은 지 3개월 만인 윤오월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 죽음으로 조정철의 목숨을 구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