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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법 선포, 암살자 명단에 올라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40] 신익희는 반민족행위자의 처벌과 관련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등록 2021.09.16 18:37수정 2021.09.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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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청사
반민특위 청사 오마이뉴스
 
국치 40여 년 만에 새로 세운 나랏일은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중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나라를 왜적에 팔고 독립운동을 탄압한 매국노ㆍ친일도배들을 청산하는 일이었다. 미군정기 입법의원에서 관련 법률안이 마련되었으나 미군정이 공포를 거부하면서, 제헌국회의 몫이 되었다. 신익희도 입법의원 시절부터 추구했던 사안이었다.

국회의장 신익희는 1948년 9월 7일 국권침탈기에 일제에 협력하여 민족반역 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특별기초위원회가 마련한 전문 32조의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의결선포했다. 헌법 제101조에 의거한 특별법의 제정이었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고, 국회는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데 이어 특별재판부ㆍ특별검찰부ㆍ사무국 등을 구성하고, 각 시ㆍ도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화신재벌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 재판정.
반민특위 재판정.wiki commons
 
반민특위는 최린ㆍ이종형ㆍ이승우ㆍ노덕술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 특히 친일경찰 출신의 경찰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친일경찰 출신 간부들은 반민특위 주도자의 암살과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몄다. 암살 대상자에는 신익희도 포함되었다.

친일경찰은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 먼저 특별검찰관 노일환과 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하여 감금 후, 강제로 "나는 38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라는 취지의 성명서 3통을 자필로 쓰게 하여, 이 성명서를 대통령, 국회, 각 신문사에 보내서 발표하고 38선으로 가는 도중에 납치한 국회의원을 죽여 애국청년이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듯이 가장하는 계획이었다. 

이들 외에 암살대상에 지목된 인물은 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특별검찰관장 권승렬, 특별검찰관 곽상훈, 서용길, 서성달,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특별재판관 오택관, 최국현, 홍순옥 등 반민특위의 핵심 관계자와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이청천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석 4)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미군정 하에서 다시 살아나 좌익계열 인사들을 무지막하게 고문했다.
반민특위 당시 체포됐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미군정 하에서 다시 살아나 좌익계열 인사들을 무지막하게 고문했다.국사편찬위원회
 
신익희는 반민족행위자의 처벌과 관련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수 차례에 걸쳐 죄상이 큰 악질 친일파를 처벌하고 이른바 생계형은 용서하여 새나라 건설에 참여토록 하자고 역설해왔다. 그럼에도 친일경찰은 그를 암살대상자로 삼은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반민족행위자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친일세력은 3.1혁명의 성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본부에까지 몰려와서 특위의 해체를 주장하고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6월 2일에는 친일세력의 사주를 받은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 몰려와 특위요원들을 온갖 욕설로 헐뜯고 체포된 반민족행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 위해 출동하는 친일경찰 1949.6.6 아침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며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위 위원을 무차별 폭행하며 연행해 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 위해 출동하는 친일경찰1949.6.6 아침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며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위 위원을 무차별 폭행하며 연행해 감.추준우
 
반민특위는 6월 3일 시위자들이 특위본부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를 외면하였다. 경찰의 방치 속에서 동원된 시위대는 특위본부를 포위하고 사무실까지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특위소속 특경대들이 공포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나타났다. 

특위의 특경대는 친일경찰 출신인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6·3반민특위활동 저지 시위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한 데 이어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였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사찰경찰의 집단사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위활동을 제약시키고 이에 대항하려는 친일경찰의 조직적인 책략이었다.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해산 등을 요구하며 집단사직서를 내놓고 있을 때인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하자"는 데 뜻을 모으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자신들의 음모를 전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를 얻어냈다.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6월 6일 심야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웃어른'의 양해를 받은 이들은 반민특위 습격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짰다. 행동책임자는 반민특위의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이 맡기로 하였다. 윤기병은 새벽 일찍 중부경찰서 뒷마당에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차출한 서원 40명을 2대의 드리쿼터에 태워 중구 남대문로의 특위본부로 출동시켰다. 

윤기병이 직접 지휘한 습격대는 특위본부 뒷골목(현 한전빌딩)에 도착하여 20명은 주변경계에, 나머지 반은 정문과 비상구, 각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직원들을 모조리 붙잡아 드리쿼터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배경은, 이승만이 직접 김상덕위원장이 거처하는 특위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악질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공권력을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이날 오후 열린 제13차 본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신익희는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 의원을 경무대(현 청와대)로 보내 이승만을 만나 사실을 청취케 하였다. 라용균은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이승만의 전언을 공개하였다.
 
반민특위 조사 위원들(활동 마감 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이 도리어 반민특위를 습격(1949.6.6)를 습격하였다. 결국 1948.8.31일에 반민특위는 해산하고 말았다. 출처: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
반민특위 조사 위원들(활동 마감 후)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이 도리어 반민특위를 습격(1949.6.6)를 습격하였다. 결국 1948.8.31일에 반민특위는 해산하고 말았다. 출처: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추준우
 
신익희의 사회로 진행한 국회 본회의는 다음날 내각총사퇴와 압수한 반민특위의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 찬성 89, 반대 59로 통과시켜서 분노의 일단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수습 방안을 모색하였다. 협상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ㆍ조응선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키로 하였다. 석방된 특경대원 중 부상자 22명은 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런 와중에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하여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 의원 등이 체포됨으로써 특위활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곽상훈 의원에 의해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다. 

반민특위는 해방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기대를 모으며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6.6사태 전날까지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승만과 이에 기생하는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도발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두 차례의 조작된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의 정신적 구심인 김구 암살사건 등 정치적 위협과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친일세력의 도발을 견디지 못하고, 공소시효 기간이 단축되는 등 반신불수의 상태를 겪은 끝에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좌초되었다.

신익희는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이같은 참담한 사태에 분노를 가누기 어려웠다. 


주석
4>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338쪽, 선인, 2003.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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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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