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조선총독부 청사남산 조선총독부 건물은, 원래 1907년 2월 통감부 청사로 지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로 바뀌었다. 총독부는 1926년 경복궁에 신청사를 완공하면서 이전했다. 그후 남산 총독부 청사는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으로 쓰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남산 조선총독부 시절에 학무국 관료로 일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우리말의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오구라는, 향가 해독과 방언(사투리) 연구에 몰두해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오구라는 <조선어 방언 연구>에서 '일시적인 흥미'로 방언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연구에착수한 이유는 문헌 자료만으로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말 어휘가 부족하다는 점도, 방언 연구에 착수한 계기였다.
오구라는 조선 곳곳을 답사하면서 방언을 조사했다. 1914년 제주도(1911년 조사, 1930년 재조사)를 시작으로, 황해도 서부(1913), 경남(1915), 경남과 경북(1916), 충남(1918), 전남(1919), 전북과 충북(1922), 경북(1923), 영동(1923), 영서(1928), 경원선 주변(함남 영흥.고원.문천.원산.안변.고산, 강원도 평강.철원, 경기도 연천, 1917), 함남과 함북(1927, 1930), 평안도(1929) 방언을 차례로 조사했다.
방언 조사를 바탕으로 오구라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기관지 <조선휘보>(朝鮮彙報)를 비롯해 <조선>(朝鮮)과 <조선어>(朝鮮語) 같은 잡지에 연구 논문을 차례로 발표했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방학을 이용해서 꾸준히 우리말 방언을 연구했다. 오구라는 우리말 방언 연구에만 20년 넘는 세월과 정열을 쏟았다. 방언 연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조사(답사) 여행에 관한 것이다. 조선 각지는 지금은 철도와 해운이 발달했고, 자동차 도로도 완비되어 있지만, 지금부터 십수 년 전에는 교통수단이 대단히 열악했다. 말을 타고 여행을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긴 조사 기간에 비해 충분한 결과물을 낼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가 20년 넘게 우리말 방언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1912년 오구라가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러 떠났을 때,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답사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 지역 경찰서에서 순사보 한 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대정읍에 도착했을 때는 보통학교 교원과 학생이 마을 입구에 도열하여 그를 맞았다고 한다.
총독부는 왜 오구라의 방언 연구를 지원했을까? 지배권력 입장에서 의사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선말 연구는 통치자 입장에서도 시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다만 조선 팔도의 방언까지 수집해서 통치에 활용한 조선총독부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35년 동안 세밀하고 촘촘한 통치를 통해, 일제가 조선을 얼마나 수탈했는지 알 수 있다.
휴가 때도 떠난 사투리 수집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