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정동제일교회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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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았다.
국치를 겪으면서 위정자들의 행태와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처신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국민이 근대적인 지식으로 무장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
배재학당 대학부가 폐쇄되면서 1913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2년간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1915년 정동제일교회 본처 전도사(Local Preacher)로 일하고, <기독신보(基督申報)> 창간에 참여하였다.
이즈음 그의 나이 어느덧 만 30세가 되었다. 나라의 사정은 총독의 무단통치가 한국인의 숨통을 조이고 옴짤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박동완은 1915년의 시점, 30의 나이에 자신이 서야 할 위치를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동안 배운 학식, 특히 영어와 법률지식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독신보사를 택하였다. 한국의 혹독한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며 기독인으로서 국민을 계도하는 일터라도 믿은 것이다. 그동안의 신앙생활과 배운 학식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기독신보>는 1915년 12월 8일 편집인은 감리교선교사 기의남(奇義男), 발행인은 예수교서회 총무였던 반우거(班禹巨 G.W.Bonwick)의 명의로 조선야소교서회 안에 사무소를 차리고 창간하였다. 체재는 소형 6면 5단으로 매주 수요일 발행하는 주간지였다. 요금은 1장 3전, 6개월 60전이다.
그는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기자ㆍ주필 등에 이어 편집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편집인 기의남ㆍ발행인 반우거로, 다음에는 사장 하이영, 편집인 조상옥, 발행인 반우거로, 그 다음에는 사장 겸 발행인 허엽, 편집인 박동완으로 교체…." (주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