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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몇 미터 태풍'... 언론, 좀 쉽게 쓸 필요가 있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 힌남노 소식에... 되살아난 태풍 트라우마

등록 2022.09.05 15:47수정 2023.03.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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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이 서있어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 기자 말

 

[현장 영상] 거칠어진 제주 바다... 9월 5일 오후, 일출봉 앞 광치기 해변 9월 5일 오후 3시 30분께, 태풍 힌남노의 영향을 받은 제주 일출봉 앞 광치기 해변의 모습이다. 일출봉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파도는 더욱 거세졌다. ⓒ 이봉수

 
자연의 위력 앞에 서면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가? 태풍 힌남노가 제주를 직격할 기세여서 사라호(1959년)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와룡국민학교는 아버지가 교감으로 재직하다가 사라호 태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곳이다.

초가였던 사택이 통째로 날아갔다. 만 다섯 살이던 내가 기억하는 사라호는 주위가 온통 밤처럼 새까매지면서 시작됐다. 아이들이 엄마 곁으로 몰려들자 엄마는 남포불을 켰다. 비가 위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옆으로 온다고 생각한 순간 폭풍우가 문종이를 찢고 들이닥치더니 집 전체를 날려버렸다. 잠깐 기절했던 듯 찬 비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와 우리 오남매가 흙더미 위에서 떨고 있었다. 여동생은 흙더미에 묻혔는데 엄마가 정신없이 맨손으로 이곳저곳을 헤집어 구해냈다고 들었다. 

학교가 통째로 날아가면서 교장 선생님은 즉사하고 교감인 아버지는 머리를 크게 다쳤다. 불어난 하천을 헤엄쳐 건너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사택으로 달려와 "애들 어떻게 됐노"를 외치던 아버지 모습이 선연하다.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는데 신작로에는 미루나무가 이리저리 쓰러져 안동읍에서 오던 앰블런스는 사이렌만 울려대며 허둥댔다. 

"태풍이 다행히 울릉도 근해로"... 이런 관행
 
 우리 정원 보물 8단 소철은 6줄로 결박해놨다.
우리 정원 보물 8단 소철은 6줄로 결박해놨다.이봉수
 
아내와 내가 운영하는 키아오라리조트는 제주도 맨 동쪽에 있어 거의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갈 전망이다. 그런데도 언론의 기상예보는 대개 '남해안에 상륙한다'는 제목으로 보도된다. '제주'란 말 자체가 '건널 제'(濟) 자를 쓰니,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는 '바다 건너 고을'일 뿐인가? 

유신 말기 대학원생 시절, 초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는 '작은 저항'으로 울릉도로 좌천돼 나도 방학이면 울릉도 태하국민학교 사택에 머물렀다. 그때 태풍이 온다며 울릉도에는 초비상이 걸렸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태풍 OO이 다행히 울릉도 근해로 빠져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재난보도도 피해구제도 '육지 중심' '서울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헥토파스칼' '초속 몇 미터' 등 대중이 알아듣기 힘든 용어들로 보도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저널리즘은 전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역인데, 가늠하기 쉽게 풀어주면 안 되나? '초속 몇 미터'는 '시속 몇 킬로미터'라고 함께 써주면 감이 잡힐 텐데...
 
 그네는 넘어트려놨다.
그네는 넘어트려놨다.이봉수
 
<조선일보> 기자 시절 중앙기상대가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옆에 있을 때 두 곳을 동시에 맡았는데, 일기예보 기사에 처음으로 확률예보를 도입하고 원고지 한 장 두 줄짜리 초미니 날씨 칼럼을 연재했다. 그때 이미 기상대는 확률로 자료를 내놨는데 모든 언론이 관행에 젖어 '곳에 따라 때때로 비' 같은 식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태풍이 오는데 한가하게 이런 글이나 쓰냐고? 실은 이틀 꼬박 우거진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고 밧줄로 동여매고 배수구의 오니를 제거하고 날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은 실내로 들여놨다. 자연의 위력 앞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 더 안도할 것 같았다. 

63년만에 사라호보다 더 센 태풍이 온다니 이건 분명 지구 온난화의 결과다.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미국의 트럼프는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고 바이든도 재가입을 지시했지만 획기적인 조처는 취하지 않고 있다.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들이 유발한 인재다. 인간은 자연 앞에 미약한 게 아니라 너무나 폭력적이다. 정말 욕 나온다.
 
 바람 저항을 줄이려고 가지치기를 한 대추야자.
바람 저항을 줄이려고 가지치기를 한 대추야자.이봉수
 
 조경용 단지를 실내에 들여놨다.
조경용 단지를 실내에 들여놨다.이봉수
 
 바베큐장 천막도 밧줄로 붙잡아 맸다.
바베큐장 천막도 밧줄로 붙잡아 맸다.이봉수
 
 작은 단지 위에는 바위 올려놨다.
작은 단지 위에는 바위 올려놨다.이봉수
 
 컨테이너 창고는 네 귀퉁이를 나무에 매놓았다.
컨테이너 창고는 네 귀퉁이를 나무에 매놓았다.이봉수
 
#힌남노 #제주도 #사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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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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