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69년 3월 29일 기사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
결국엔... "국민학교를 새로 만들어 취학"
결국 에틴저 마을 아이들은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 대신 교육 당국은 새로운 학교를 설립해 미감아와 미감아 아닌 아동들을 함께 교육하기로 했다.
<경향신문>의 '대왕교 미감아 분리 교육' 기사(1969년 5월 28일)는 "미감아 5명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 안에 국민학교를 새로 만들어 취학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래서 수유동에 한신국민학교가 설립됐다. 에틴저 마을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듬해인 1970년 3월부터 한신국민학교엔 한강 건너 에틴저 마을 아이들과 당시 도봉구에 살던 아이들이 함께 입학하게 된다. 수유동에 살던 기자도 1973년에 1학년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강남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멀리서부터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친구들 모습은 기억난다.
<조선일보> 1975년 2월 9일의 '상처 씻은 미감아 졸업식' 기사는 한신국민학교에서 거행된 에틴저 마을 아이들의 졸업식 모습을 전한다. "졸업생 중 8명"은 "6년 전 사회를 들끓게 했던" 이른바 "미감아 취학 거부 사건"의 "주인공들"이었다면서.
이후 쌍문동으로 이전한 한신초등학교의 소위 '미감아 교육'은 1991년까지 진행됐다. 에틴저 마을 아이들은 왜 그토록 먼 거리를, 강남 끝자락의 집에서 강북 끝자락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만 했을까?
아마도 50년 전 자기 자녀들을 등교 거부로 몰면서까지 자기와 다른 것을 분리하고 배제하려 한 어른들의 의지가 만든 광경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지도.
에틴저 마을 혹은 헌인마을
예전에 음성 나환자촌은 도시의 변방에 있었다. 에틴저 마을로 불렸던 헌인마을도 서울의 끝자락이었다. 지금도 헌인마을 앞 큰길로 조금만 더 가면 경기도다.
<조선일보> 1969년 5월 8일의 '왜 아이들이 아니올까... 나 때문에 그럴까?' 기사는 에틴저 마을의 위치와 유래를 알려준다. "서울 중심지에서 28km, 성동구 천호동에서 수원에 이르는 구도를 40여 리" 가다 보면 "대모산 기슭에 '에틴저 마을'이라는 표지가 나타난다"고.
그 마을은 "1963년 국립부평나병원에서 완치된 음성환자 53세대"가 정착한 것이 시초고, "미국 사회 사업가 '에틴저'씨가 기자재를 기증"한 것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됐다고 기사에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