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책과나무
그런데 실제 안락사 현장에 동행한 후 그 이야기를 담은 신아연 작가의 책은 안락사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지게 해주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지극히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은 예상과 다르게 안락사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안락사에 동행한 후 지독한 인본주의에서 지극한 신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작가는 담담하게 그 동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놀라웠던 것은 작가가 묘사한 실제 안락사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건조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말기 암 환자가 육체의 끔찍한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그야말로 원하던 죽음이었다. 그 결정이 쉽지 않았던 만큼 그 끝이 왠지 슬프지만 감동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였다고는 하지만, 고통이 없는 상태의 사람이 농담인 듯 가볍게 스스로 생명을 끝내는 장면은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환자의 감정에 이입된다기보다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럽고 찝찝했다. 촛불이 사그라들듯 사라지는 생명이 아닌, 잘 작동하고 있는 전자제품의 전원을 갑자기 차단한 것 같은 죽음이었다고 할까.
자연스레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 죽음의 충격은 오로지 남겨진 자들의 몫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락사를 지켜보아야만 했던 가족들에게 남은 후회와 죄책감이 감당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오던 죽음이라는 선택. 너무나 인간적인 권리로 느껴지던 그 선택적 죽음이 어쩌면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사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장 이기적인 욕심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중요한 건 나의 일상을 돌보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그동안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탓에, 그리고 아직은 먼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주제에 불과했다. 그런데 얼마전 허망한 죽음들을 맞이했던 탓인지, 아니면 중년에 접어든 나이탓인지 이번에는 오래도록 이 생각이 마음에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생각이 거듭될수록 '죽음'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아마도 웰빙과 웰다잉이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할까. 이 철학적인 문제에 답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이루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듯, 나는 나의 마지막도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나온 결과이길 바란다. 내 삶의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삶의 그 끝에서도 나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지난여름 서울대 졸업식에서의 허준이 교수의 축사가 생각이 났다.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도전이나 열정이란 말 대신 친절이라는 다정한 언어로 졸업식을 더욱 빛냈던 그 한 구절 말이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승진, 은퇴, 노후 준비와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길 바란다.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
이 말이 너무나 와닿았던 것은 어쩌면 이 말이 일상의 핵심을 말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도장 깨듯 지나가는 일상이 아닌 나를 반겨줄 수 있고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친절한 일상,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잘 사는 법이자 잘 죽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머리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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