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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참여, 일경에 소금·고춧가루 뿌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4]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통해 한국사회를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등록 2023.01.02 15:22수정 2023.01.0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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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는 포악무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총독은 입법·사법·행정권은 물론 육·해군에 관한 군사통제권을 가지고 있어 절대군주와 다름이 없었다. 데라우치는 부임하면서 "조선인은 일본 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협박하면서 무단통치를 자행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통해 한국사회를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헌병대장과 경찰서장에게 즉결처분권을 주어 저항하는 사람을 현지 사살하고 여성들을 성폭행하며 재산을 갈취했다. 일본인 마쓰시다 호난(松下芳男)이 "개미 한 마리도 기어나갈 틈이 없을 정도"라고 평한 그대로였다. 

서민호는 조혼풍습대로 중3학년 때에 부모의 주선으로 결혼을 하였다. 배우자는 이화여고보를 다니는 한 살 아래의 규수이다. 장인 정태인 목사는 임시정부와 맥이 닿는 항일운동가였다.

서민호는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에 3.1혁명을 맞았다. 한 해 전부터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전국학생대회라는 지하조직이 시작되면서 그는 운동부장으로 활동했다. 뒷날 국회의장이 된 곽상훈은 경성공업전습소(고등공업 전신)의 운동부장이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온 비밀지령문을 등사하여 각지에 배포하는 이른바 <반도목탁지(半島木鐸誌)>의 책임을 맡았다.

막중한 책임을 맡고, 일경과 헌병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해서 전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인쇄물을 몸에 감추고 지령에 따라 돈화문을 통하여 창덕궁(현 창경원) 앞을 지나 (나는 이미 교내 반도목탁지 사건의 주모자라해서 일경의 눈총을 받고 있는 터라 그들을 피해 다니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곳 파출소 앞을 지나치려는 순간 일경의 수색을 당하게 되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늘 보신용으로 휴대하고 다니던 소금과 고춧가루를 그들의 눈을 향해 뿌리고 도망치려고 하는데, 또 다른 한놈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려하였다. 그놈의 눈 정면에다 또 고춧가루를 뿌렸더니 기겁을 하여 얼굴을 감싸고 그 큰 체구로 길가에 나동그라 뒹구는 것이었다.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며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하도 우습고 통쾌해서 달아나면서도 통쾌함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애국학생들은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내걸고 활약했다. 더러는 개만도 못하게 일경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쓰레기같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기에 앞서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주석 1)


이 사건으로 서민호는 1년간 정학처분을 받았다. 학교 당국의 정학처분과는 별개로 경찰은 그를 수배했다. 고향 근처에서 용케 피신했다가 1919년 4월 하순 상경하여 청진동 하숙집에서 피검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장인이 마련한 독립운동 군자금과 아버지가 임시정부의 비밀 요원에게 돈을 건네는 것을 목격하고는 상하이로 망명하고자 준비하던 중 일경에 피검된 것이다.

나의 장인인 정태인 목사는 상해임시정부와 내통을 하면서 독립투쟁군자금을 모금하고 있었는데 자수성가하여서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깐깐했던 아버지께서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1만원을 내기로 하고 5천원은 즉시 현금으로 수교하게 되었다. 이 돈을 전달하기 위해서 고향 뱀골고개 산소에 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임시정부(사람)와 중간에서 연락을 취하도록 된 분을 만나서 전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같이 가서 목격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아버님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시골집에서 남몰래 숨어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려 상해임시정부로 피신을 하려고 1919년 4월 하순 께 서울에 올라왔다가 청진동 하숙집에서 피검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됐다. (주석 2)

아직 어린 나이에 6개월의 감옥살이는 힘겨웠다. 그만큼 가슴 속에서 일제에 대한 증오심이 쌓이고 있었다. 감시는 더욱 심해지고 어떤 활동도 하기 어려웠다. 국내에서는 숨도 크게 쉬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애국청년들은 분출구를 찾아 해외 유학이나 망명길에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서민호는 갈림길에 섰다. 망명의 길은 경찰의 감시로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차라리 이 기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고, 이후 다른 방법을 찾기로 작심하였다. 


주석
1> <이 정권과의 투쟁(5)>
2>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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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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