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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100년간..." 윤 대통령 인터뷰에 없는 중요한 사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제1차 대전 후 유럽서 벌어진 일들... 제대로 된 사과가 지닌 의미

등록 2023.04.25 11:23수정 2023.04.2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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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WP는 24일 윤 대통령의 단독 인터뷰를 보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WP는 24일 윤 대통령의 단독 인터뷰를 보도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엉터리다. 24일 보도된 인터뷰에서 그는 안보 문제 때문에 "도쿄와의 협력"을 연기할 수 없었다고 해명하는 대목에서 유럽 사례를 거론했다.

그는 "유럽은 지난 100년간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교전국들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모색했다"면서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무언가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그들이 우리의 100년 전 역사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100여 년 전 일본이 식민지배 한 일을 근거로 일본의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강제징용(강제동원)이나 위안부 피해 등을 이유로 사과·반성 및 배상을 관철시키지 못한 일을 그렇게 합리화한 것이다.

이 발언이 논란이 되자, 대통령실은 공지를 통해 "이런 식의 접근이 미래 한일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일관계 정상화는 꼭 해야 하며, 늦출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참상을 유발한 과오를 비판하는 게 먼저

그는 자신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지난 100년간의 유럽을 거론했다. 유럽 국가들이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협력한 것처럼, 한국도 일본과의 과거에 구애되지 않고 협력을 강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이 전쟁을 계기로 미래를 함께 모색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국제연맹을 창설하고, 제2차 대전을 계기로 국제연합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런 성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대미문의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과 무관치 않다.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 공전의 참상이 유발된 탓에, 그런 기구라도 만들지 않으면 상황을 수습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국제연맹·국제연합 창설에 기여한 일을 칭송할 게 아니라, 그들이 탐욕스런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 그런 참상을 유발한 과오를 비판하는 게 먼저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0년간의 유럽인들이 전쟁이나 갈등을 잘 처리한 것처럼 말했지만, 지난 100년간 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곳이 바로 유럽이다. 미증유의 세계대전은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에서 두 번이나 발생했다. 그것도, 첫 번째 대전(1914~1918)이 끝난 지 불과 21년 만에 두 번째 대전(1939~1945)이 일어났다.


이는 지난 100년간의 유럽인들이 전쟁과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음을 반영한다. 국제연맹·국제연합 창설에 기여한 성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과오가 지난 100년간의 유럽에서 나왔다.

유럽은 독일이 21년 간격으로 두 번씩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제1차 대전 전범국인 독일에 대해 배상금 정책조차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를 이용해 독일은 또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배상금을 부과하는 것은 전범국의 반성을 유도하는 동시에 재무장의 기회를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전범국 내에서 반성의 기운이 고조되면, 전쟁을 선동하는 극우세력의 입지도 자연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유럽 국가들은 바로 여기서 실패했다. 유럽은 독일의 반성을 유도하지도 못하고 재무장을 차단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아돌프 히틀러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일어난 두 번째 대전
 
 지난 3월 16일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 도쿄 총리 관저를 방문한 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
지난 3월 16일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 도쿄 총리 관저를 방문한 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승전국들은 처음에는 독일의 배상금을 200억 골트마르크(금화 마르크)로 정했다가 1921년 4월 27일에 1320억 골트마르크(금마르크)로 인상했다. 독일이 이것의 66분의 1인 20억 골트마르크을 매년 지급하는 동시에 연간 수출액의 25%를 해마다 별도로 지급하는 방안이 이때 결정됐다.

독일은 그해 5월에 10억 골트마르크와 수출액 25%(3억 골트마르크)를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흐지부지시켰다. 이 때문에 1924년에 미국인 찰스 도스가 제시한 도스 플랜(도스안)이 대안으로 부각되고 1929년에 미국인 오웬 영의 영 플랜(영안)이 새로이 부각됐지만, 그 어느 것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에 이르러 배상금을 44분의 1로 줄이고 지급 시기를 독일 경제회복 이후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됐다. 독일 경제회복 이후로 보류했으니, 실질적으로 배상금을 면제해준 셈이다.

결국 독일은 제1차대전 도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게 됐다. 이 때문에 독일의 반성을 끌어내지 못했고 이것이 제2차 대전을 재촉했다. 독일이 1939년에 두 번째 대전을 일으킨 데는 유럽 국가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1320억 골트마르크라는 배상금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평가가 있다. 금액 산정이 지나쳤다면 이 역시 승전국들의 잘못이다. 비현실적인 금액을 산정한 것은 배상금을 아예 부과하지 않는 것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는 독일의 반성과 배상을 관철시키는 일에 유럽 국가들이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독일의 배상금 미지급을 이유로 거친 반응을 보인 국가도 있었다. 1923년 1월에 프랑스는 독일 최대의 철·석탄 산지이자 중공업 중심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독일 경제는 파탄 직전으로 내몰렸고, 배상금 지급은 더욱 어려워졌다. 프랑스가 보여준 극단적 행동 역시 배상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타 유럽국가들은 이로 인해 명확히 불이익을 입었다.

미국의 비호하에 사과와 배상 기피하고 있는 일본

동아시아에서는 제2차 대전 전범국인 일본이 미국의 비호하에 80년 가까이 사과와 배상을 기피하고 있다. 일본은 제대로 반성할 필요도 없게 됐고, 과거의 영광을 추앙하는 극우세력이 자민당과 일본 내각을 장악하는 지금의 상태로까지 이어졌다.

동아시아와 양상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제1차 대전 이후의 유럽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독일에 대해 배상금을 부과하기는 했지만, 비현실적인 금액을 산정한 데다가 이를 제대로 집행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과도한 군사행동을 일으켜 도리어 부작용을 낳았다. 이로 인해 독일은 굳이 반성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지금의 동아시아와 실질적으로 다를 바 없게 됐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독일 극우파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히틀러가 총리 취임 6년 전인 1927년에 완성한 <나의 투쟁>에도 그런 감정이 묻어 있다. 이 책에는 프랑스의 야심찬 행동으로 인해 향후 독일이 기회를 얻게 될 거라는 히틀러의 예언적인 말이 담겨 있다.

그는 이탈리아 및 영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진단하는 대목에서 "탐욕스럽게 그칠 사이 없이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추구하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은 양국에 모두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뒤 헝가리·스페인 등도 프랑스를 견제한다면서, 국제적 역학관계가 바뀌면 독일이 기회를 얻게 되리라고 전망했다. 유럽이 독일의 반성과 배상을 철저히 관철시켜 독일 극우파의 부각을 견제했다면, 30대 중후반의 히틀러(1889년 생)가 이런 자신감을 글로 옮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독일 역사학자 하겐 슐체는 <새로 쓴 독일 역사>에서 제2차 대전 발발 1년 전과 관련해 "1938년 3월 12일 제국국방군은 영국과 이탈리아가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예상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했다"고 설명한다. 히틀러가 이런 확신을 가진 것은 독일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태도가 느슨했기 때문이다. 제1차 대전 이후 유럽의 전쟁 관리 혹은 전쟁 예방이 실패한 데 기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무릎을 꿇리지 못한 것의 후과

유럽이 불과 21년 만에 새로운 대전에 휘말린 것은 독일의 무릎을 확실히 꿇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 예방이나 관리와 관련해 유럽으로부터 배울 게 별로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지난 100년간의 유럽을 거론하면서, 100년 전 일을 갖고 일본의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단언했다.

사과·반성과 배상의 방법으로 일본의 무릎을 꿇리지 못하면, 일본 역시 제2의 독일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런 징후는 이미 우리 목전에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전쟁할 수 없는 국가'에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의 무릎을 꿇리지 못한 것의 후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의 사과·배상을 받아내지 않은 것을 잘한 일인 듯이 말했지만, 이런 태도는 '한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예상'을 하고 일본 극우가 거침없이 전진하도록 하는 어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윤석열 워싱턴포스트 #한일관계 #강제징용 #강제동원 #굴욕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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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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