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 묘비.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대한제국 특사로 활약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이상헌
배재학당 출신인 서재필, 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글 보급과 발전에 이바지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도입했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자문 역할을 맡아 서방 국가를 향한 외교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특사로 임명되어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끌어낸 장본인 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리고자 한다. 고종의 친서를 갖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고 추방당한다.
광복후 1947년 이승만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대한민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폐렴을 얻어 별세하면서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은 그의 아들 셸던(Sheldon Hulbert)도 같이 묻혀있다. 그의 묘비는 1949년에 세워졌고 이승만이 묘비명을 쓰기로 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50년이나 지난 1999년 헐버트 박사 50주기 추모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채워진다.
▲ 백년 전 일이라구요? 대한민국에 묻히기를 소원한 이들입니다 ⓒ 이상헌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다
독일 귀족으로 대한제국 육군 군악대를 창설한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한국명 예계로)는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역시 3대에 걸쳐 한민족을 위해 봉사한 가문이다. 프란츠는 프로이센 왕립악단 단장으로 일하던 중 고종황제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도착했다.
헐버트가 창간한 영어 잡지 코리아 리뷰 2월호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서도 20년간 활약한 바 있는 프란츠 에케르트의 공헌으로 한국인의 음악 재능과 합쳐 훌륭한 시위군악대가 만들어질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는 기사를 냈다. 그는 대한제국 양악대를 창설하고 탑골공원에서 정기공연을 하며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다.
고종 황제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경운궁에서 군악대 연주가 열렸으며 외교 사절들의 극찬을 받으며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씨앗을 뿌렸다. 안타깝게도 대한제국 애국가는 을사늑약으로 금지되었고 친일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지금도 우리나라 국민이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