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KL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간다는 사진의 명소.
안정인
클랑강(Kelang River)과 곰박강(Gombak River) 주변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인 '쿠알라룸푸르'는 '진흙강의 합류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세기 주석 광산업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이곳은 말레이시아가 영국에서 독립한 1957년부터 수도의 기능을 맡았다.
13개 주의 연방 국가 성격이 강한 말레이시아는 1974년 쿠알라룸푸르를 슬랑오르주로부터 분리해 독립된 행정권역으로 지정했다. 이후 도시는 급속하게 팽창했고 1999년 비대해진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해 쿠알라룸푸르 남쪽 36Km 떨어진 곳에 '푸트라자야'라는 새로운 행정 도시가 건설됐다.
말레이시아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과 일본, 그리고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역사가 있다. 하지만 투쟁이나 전쟁 대신 협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낸 때문인지 영국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우호적이다.
1957년 8월 31일 독립국이 됐지만 아직도 옛 영국 식민지 출신 국가들 위주로 결성된 국제기구인 '영연방'의 일원이다. 1998년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연방 경기 대회(Common wealth Games)'를 개최하기도 했다. '식민지'라고 하면 일제 강점기가 먼저 떠오르는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영국처럼 말레이시아에도 '왕'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국의 왕들이 모두 '윈저 가문'의 후손들인데 반해 말레이시아의 왕은 5년 임기로 선출된다. 말레이시아를 이루고 있는 13개 주 가운데 9개 주에는 왕(술탄)이 있다(각각의 왕은 세습된다).
13개 주(9개 주의 술탄과 4개 주의 주지사) 대표들은 5년마다 9명의 왕 중 하나를 '말레이시아 국왕'(Yang di-Pertuan Agong )으로 선출한다. 비밀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고는 하지만 9개 주의 술탄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연방의 국왕으로 재임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간단하게 계산해 보면 선왕에게 일찍 왕위를 물려받은 후 45년 동안 살아있기만 하면 두 번의 국왕도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국왕은 말레이인만 될 수 있다. 공식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아마 왕비도 말레이인만 가능할 것 같다. 이런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2016년 말레이시아 국왕이 된 무하맛 5세는 2018년 러시아 출신의 옥사나 보예보디나라는 여성과 비밀 결혼을 한다. 외국인 왕비를 용납할 수 없었던 8개 주의 군주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해 국왕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정확한 이유는 비공개되었지만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짐작이 된다. 무하맛 5세가 무슨 심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는 듯했다. 퇴위 이후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다'든가, '세기의 로맨스' 같은 기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2019년 아이가 태어난 후 무하맛 5세는 일방적으로 이혼을 공표해 버린다. 뜨거운 사랑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속력은 좀 약했던 모양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연방국왕은 2019년 1월에 등극한 압둘라 국왕(Abdullah Sultan Ahmad Shah)으로 파낭(Pahang) 주의 술탄 출신이다. 국왕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20년 기존 총리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새 총리를 지명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영국 왕이 마음대로 영국 총리를 지명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역동적이라면 역동적인 말레이시아 정치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