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현익철 선생 장례식 사진.
현익철 선생 유족 / 박도
김구는 한 달이 가까워진 뒤에야 자신이 총격을 받은 사실과 더불어, 그때 희생된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수행한 48세의 현익철이 병원 도착 직후에 운명했다는 비보를 뒤늦게 접했다. 김구는 "순국한 현익철군은 나이 오십 전이었고 사람됨이 강개하며 아는 것이 많았다"면서 그리워했다.
이운환이 노린 제1표적은 김구였으므로, 살아남은 김구가 현익철에게 품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이 유독 강해진 날이 팔월 한가위였다.
그해 추석인 양력 10월 8일이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김구가 중국 남동부 광저우에서 남서부 충칭으로 이동할 때였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추석을 맞은 그는 묵관 현익철의 묘소가 근처에 있음을 알게 됐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중에 광주에서 조성환·나태섭 두 동지와 함께 중경으로 오던 길에 장사에서 귀양 가는 차를 기다리게 됐는데, 그때가 바로 음력 추석날이었다. 나는 현묵관의 묘소를 참배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두 동지가 극력 만류해 둘만 술과 안주를 가져가서 참배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먼 길을 가는데, 내가 묵관의 묘 앞에 당도하면 애절 통절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슨 변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돼 동행을 못 하게 했다는 것이다."
추석날 현익철 묘소를 지척에 두고도 성묘를 못한 김구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묘소 위치를 확인했다.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두 동지는 길가 산중턱에 서 있는 비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현묵관 묘라 하기에 나는 목례를 했다"고 김구는 회고했다. "군은 편히 쉬시라. 그대의 부인과 자식들은 내가 안전하게 보호하리니"라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백범 김구 평전>은 김구가 조성환·나태섭과 함께 움직인 이 시기를 서술하면서 "임시정부와 백범에게 중일전쟁이 격화된 1938년은 피난에서 피난으로 유랑하는 고달픈 한 해였다"고 평한다. 그런 고달픈 유랑의 와중에 김구가 가슴 아픈 추석을 보냈던 것이다.
망명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어땠을까
중국에서 활동하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추석 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렸을 고국의 명절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3.1운동 2년 뒤에 발행된 1921년 9월 16일 <동아일보> 기사 '금일은 추석'은 "추석이 되면 떡을 맨들고 과실을 사서 제물을 준비하야 가지고 각각 디방의 풍속과 그 집안 가풍을 따라서 혹은 집안에서 혹은 산소에 가서 다례를 지내는 일이 잇는대"라는 말로 한가위 풍경을 묘사했다.
김구와 현익철이 저격 당하기 8개월 전에 발행된 1937년 9월 19일자 <조선일보> 기사 '음력 팔월 보름, 오늘은 추석날'은 "추석에 딸어다니는 음식은 국으로서 도란과 떡으로서 송편의 두 가지"라며 "그중에서도 도란국보담 송편은 추석을 차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국 중에서는 토란국이고 떡 중에서는 송편이지만, 토란국보다는 송편이 더 중요하다는 기사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여럿이 어울려 성묘 가는 풍경은 망명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특히 아련했을 것이다. 위의 1921년 기사는 한가위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 묘디가 만흔 곳에를 가면 어대든지 남녀로소가 묘소에 와서 처량스러운 소래로 우는 것을 볼 수 잇스며 어린 아해와 아가씨들은 꼿가치 아름다운 추석비음을 입고 새 실과들을 주고밧으며 노는 것도 재미잇스며 밤이 되면 일년에 뎨일 밝은 가을 달을 놋치 말고 실컷 보는 것도 조흔 일이라 하겠더라."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가족 못지않은 동지애를 서로 느꼈다. <백범일지>에도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는 "대가족"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추석날 현익철 묘소를 지척에 두고도 직접 성묘하지 못한 김구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아팠을 것이다.
추석마다 "날으는 유격대장 홍범도" 찾은 고려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