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아름다운 질매섬의 숨은 그림자

[다시 만날 그날까지 19] 경남 사천편

등록 2024.01.11 09:32수정 2024.01.11 09:49
0
원고료로 응원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a

경남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무인도 질매섬(마안도) 전경 ⓒ 김영희

 
[다시 만날 그날까지 18] "내 소원은 아버지께 따뜻한 된장찌개 한 그릇 올리는 거예요"(https://omn.kr/26w3a)에서 이어집니다.

경상남도가 2021년도 경남 유족의 뜻을 이어받아 2년에 걸쳐 각 시∙군(18개)의 유족들의 상흔을 녹취해 증언록을 발간했다. 경상도 지역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천혜의 환경조건을 갖춘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어 빨치산(유격대)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기에 더욱 보도연맹원들의 집단학살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필자는 '70년 만의 증언'을 토대로 18개 시∙군의 유족들과 매장지를 현장 답사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학살지의 실태조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천편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a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자 경남유족 증언집 1~5권 ⓒ 김영희

 
사천유족회는 위령제를 '사천왕사'에서 지낸다

사천지역의 한국전쟁 전후 학살된 민간인 중 정치범은 진주형무소 구치소에 감금됐다가 학살되기도 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1950년 7월 25일(음력 6월 11일)부터 27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인민군 일부가 남아있어서 미군이 촉석루를 폭격한 후 사천지역 학살이 본격화됐다. 즉, 보도연맹원 400~550여 명을 삼천포경찰서나 동부파출소에 감금했고 삼천포초등학교에 예비검속돼 있던 분들이 모두 학살당했다. 현재 매장지가 확인된 곳은 하일면 질매섬(마안도), 노산공원, 학섬, 온정마을 4지점이다.

그 외도 바닷가 부근이기에 수장이 많이 됐다. 그래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파악이 정확하지 않다. 사천유족회는 육지에 매장된 시신은 거의 수습했고 매년 학살된 민간인의 위령제는 사천시 사남면 심방길 144 '사천왕사'에 위패(50위)를 모셔 놓고 올리고 있다. 
 
a

한국전쟁기 피학살자 위패 모신 사천왕사 ⓒ 김영희

 
a

50위패 모신 영가전 모습 ⓒ 김영희

 
6월 25일 진주 위령제 날

사천유족회장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2021년 6월 25일 진주위령제 행사를 초전공원 위령탑에서 실시했다. 필자도 위령제에 참석했다. 이제는 진주 유족분들과는 포옹도 할 정도로 편하게 지낸다. 귀빈 소개에서 사천유족회장님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행사 마친 후 인사를 하고 이봉환 어르신(사천 유족)의 연락처를 받았다.

어느 날 통화에서 가슴이 철렁

며칠 후 이봉환 유족(86)께 전화를 드렸다. 잠시 소개도 제대로 하기 전에 몇 마디 듣지도 않고 화를 벌컥 내시면서 전화기 속에서는 뚜뚜뚜 소리만 들린다. 사실 필자는 항상 유족과 통화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긴장된다. 72여 년간 유족들의 상흔을 들추는 일이기에 미안하고 또 죄송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 끝을 봐야지 하면서 용기를 내어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 신호가 간다.

"여보세요. 어르신, 제발 잠시만 제 말 들어 보시면 안 될까요?" 순간 적막이 흐른다.


"뭔지 말해보시오."

조심스럽게 필자의 신분과 사정을 설명한 뒤 말씀드렸다.

"사천에는 지금 매장지가 사천(삼천포) 노산공원과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그리고 용현면 석계리 온정마을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저하고 동행해 매장지를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뭐 그렇다면 동행해 드리리다. 나도 농사짓고 바쁜데..."

그렇게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돌리니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사실 진주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사천인데, 사천 매장지에는 어떤 사연이 있고 현재 상황이 궁금했다.
 
 학살지 질매섬(마안도) 이야기


삼천포 벌리동에 거주하고 계시는 이봉환 어르신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키가 훌쩍 큰 분이 모자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걸어오신다. 인사를 가볍게 하고 필자의 차에 모셨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몸도 불편하신데 안내해 주셔서요."

"좋은 일 하신다는데 내가 당연히 안내해야지요."

"어르신 상처를 다시 되새기게 해서 미안합니다. 세 곳 중 어디부터 먼저 가실까요?"

"나는 질매섬과 노산공원만 안내해 주겠소. 온정마을은 나도 잘 모른깨..."

"질매섬은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내가 길을 아니깨 그냥 가시오."

질매섬은 경남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 속한 무인도로 사량도와 하일면 사이에 있는 섬이다. 질매섬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300여 명으로 추정한다. 질매란 길마의 사투리다. 길마는 소나 말 위에 얹는 안장같이 생겼다고 하여 길마, 즉 마안도(질매섬)이라고 한다. 옛적에는 사람이 살았고 거주 당시 평평하게 일궈놓은 밭도 있었다. 학살은 그곳과 모래톱에서 자행됐다.

질매섬을 자세히 보면 섬 둘레에 하얀 모래톱이 형성돼 있다. 이것은 물살이 세다는 뜻이다. 겉으로 바라보니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이지만 이런 곳이 학살지라니 가슴이 아프다. 왜 질매섬을 학살지로 선택했는지 궁금했는데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이곳은 물살이 아주 센 곳이야! 그리고 뱀이 많이 서식했어." 역시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학살 만행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상해죄로 끌려간 형님이 보도연맹원으로 둔갑돼
 

질매섬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르신과 대화는 계속된다.

"학살당한분은 누굽니까?"

"한국전쟁 당시 맏형 이연조(당시 28세)씨가 동네 구장이었던 이○○(아버지 4촌)씨의 상해죄 고발로 삼천포 남양지서로 끌려갔는데, 이후 보도연맹원으로 둔갑돼 삼천포경찰서에서 노산공원으로 끌려가서 학살당했어요."

"형은 어떤 분입니까?"

"맏형(이연조)은 삼천포 일출초등학교(현재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북해도 와니시 제철공장 지배인으로 지내다가 1949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4월에 곧바로 결혼하고 이듬해인 1950년 음력 6월에 끌려갔어요."

"왜 상해죄인데 보도연맹원으로 둔갑됐습니까?"

"형이 끌려가기 전날 밤에 구장(이○○)과 지서 주임이 동생(이권환) 군대 소집영장을 전달하러 왔고, 그렇게 동생은 군대에 끌려간 후 형은 구장에게 동생의 영장 문제로 항의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있어 형이 구장에게 빰 한 대 때렸는데 구장은 제중병원에 3주 상해 진단을 끊어 형을 고발해버렸어요."

"구장이 아버지 사촌인데 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러니깨 구장이 나쁜 놈이었어요. 형이 끌려가고 3일 후 아버지도 경찰서에 연행됐어요. 부자가 경찰서에 같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버지는 아침에 석방됐어요.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셔서는 '아마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갔으니 죽였을끼다. 그 장소는 질매섬으로 들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질매섬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춘암 포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질매섬에 도착했다. 어르신이 질매섬을 찾은 지 시일이 오래돼 방향을 헷갈려하셨다. 동네 주민께 여쭤본 뒤 질매섬이 잘 보이는 춘암포구에 도착했다.
 
a

왼쪽 질매섬, 오른쪽 이봉환 유족 ⓒ 김영희

 
춘암포구에 도착하니 바닷바람이 세차다. 그런데 이봉환 어르신은 불편한 몸으로도 힘차게 포구를 걸어가신다. 포구 가까이 가서 보니까 꽤 파랑이 세차게 출렁거린다. 어르신과 필자를 반겨주는 듯 철썩철썩 소리를 낸다. 포구 입구부터 질매섬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더니 포구 끝부분으로 가니 드디어 자세히 보였다. 이곳에서 보면 질매섬이 2개로 보이는데 사실은 2개가 붙어있어 한 개의 섬이다.

"이곳에서는 몇 명이 학살됐을까요?"

"이곳에 끌려온 사람은 300여 명 정도로 모두 학살됐어요."

"당시 어머니와 머슴 그리고 나(당시 14살) 세 명이 삼천포 팔포항에서 배를 한 대 빌려서 질매섬을 들어갔어요."

어르신은 앞에 보이는 큰 섬과 작은 섬이 이어지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잘록한 곳에 모래가 짝 깔려있었는데 그곳에 시신을 끌고 가서 동그랗게 2인 1조로 세워서 모내기할 때 사용한 못줄로 묶어서 총을 쏘아 사살했대요.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면서 수장도 했어요. 배 위에서 던진 거지 뭐. 2인 1조로 손목을 묶을 때 돌을 네모 모양으로 갈아 만들어서 못줄과 손목을 묶었어요. 그래 가지고 수장한 사람들은 조수간만으로 시신이 물속에서 떠올라서 시신을 건져서 찾아간 유족도 있어요.

잘록한 곳으로 배를 정박하고 도착한 어머니와 머슴은 시신이 얽히고설켜 검붉은 핏속을 뒤지면서 18구 정도를 찾았지만, 형은 없었어요. 밀물 때라 물이 허리까지 찼고 해는 저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자식아 꿈에라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라'하면서 통곡하셨는데 망연자실한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어제같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어르신은 눈시울을 적신다.

"이제 노산공원으로 갑시다. 내가 노산공원 가서 자세히 설명해 주리라."
 
a

노산공원 전경 ⓒ 김영희

 
*20화 사천 노산공원편이 계속됩니다.
 
a

진주 봉강리 발굴 현장에 있는 필자의 모습 ⓒ 김영희

덧붙이는 글 김영희(전 교사)/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봉사자
#경남고성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국가 수도 옮기고 1300명 이주...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2. 2 딸이 바꿔 놓은 우리 가족의 운명... 이보다 좋을 수 없다
  3. 3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4. 4 전화, 지시, 위증, 그리고 진급... 해병 죽음에 엘리트 장군이 한 일
  5. 5 '헌법 84조' 띄운 한동훈, 오판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