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제주도 한림읍 명월국민학교가 폐교되자, 동네 청년들이 카페와 진시공간으로 꾸몄는데 풍금은 창가에 남겨두었다.
이봉수
남의 자식 교육에는 그렇게 헌신하면서…
류근 시인의 시에 내가 단 댓글에도 공감하는 이가 꽤 많았다.
그런 선생님이 참 많았던 시절입니다. 저희 아버지 얘길해서 민망하지만 시골학교 6학년 담임 때 촌놈들 안동에 중학교 보내려고 방학 때도 합숙을 하며 과외수업을 했습니다. 학부모들이 중학교 보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으니 당연히 공짜였죠.
저희 집은 학교에서 멀다고 학교 앞 농가의 사랑방을 빌려 수업을 했는데 아버지가 가끔 집에 와서 반찬을 가져가셨고, 신경통이 심하던 어머니 대신 더러는 저학년이던 제가 눈 덮인 왕복 시오리 길을 걸어서 반찬 배달을 했죠. 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한번은 초가집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아무 말없이 제 손을 끌어다 불을 쬐게 하셨죠.
스승의 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시를 보니 눈물이 핑 도네요. 저희 형제들은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으면서 남의 자식은 그렇게 열정을 다해 가르치셨는지......
풍금도 잘 치셨습니다. 운동회 날엔 풍금을 운동장에 내놓고 행진곡 풍의 동요를 치셨는데 약한 풍금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운동장이 조용해졌죠. 살아가면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연주를 더러 봤지만 내 맘속 아버지의 풍금치는 모습만큼 위대하지는 않았습니다. ㅠㅠ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산수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발단은 분수를 소수로, 소수를 분수로 바꾸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거였다. 실은 담임선생님 자신이 그걸 할 줄 몰랐기 때문이지만 아버지(이경원)는 한번도 나를 가르쳐준 적이 없다.
고교로 올라가자 수학시간은 누적된 학력 결손으로 지옥처럼 괴로웠고 모의고사에서 '빵점'을 받는 때가 많았다. 수학을 기초로 하는 물리·화학도 바닥이었다. 도대체 전과목으로 수십만 또래 학생의 재능을 평가하고 그 줄이 평생 이어지는 현실에 분노하며 교실에 앉아있었으니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나마 문과 과목은 잘하는 게 아까웠던지, 수학선생님은 공통수학 중에서도 인수분해만 외우다시피 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지망하는 대학에는 한 과목이라도 영(0)점을 받으면 과락하는 제도가 있었기에 웬만하면 풀 수 있는 인수분해를 기본 문제로 출제했기 때문이다.
"제 논문은 불효의 대가입니다"
작고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내 마음속에서 부모를 영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임종을 못한 탓이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과 불법 증여 문제 등을 비판하다가 <한겨레> 경영진도 부담스러워하자 사표 던지고 유학 떠날 때 아버지는 "이제 다시 보겠냐"며 사별하듯 눈물을 흘렸다. 며칠 전 페이스북 친구가 병수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기에 댓글을 달았다.
그래도 오래 곁에 계시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영국 유학중 치매 앓던 어머니 돌아가시고, 병 수발하던 아버지가 "이제 내 책임은 다 면했다"고 하셨는데, 영국으로 복귀한 지 달포 만에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학위논문 '감사의 글'에 '이 논문은 불효의 대가'라고 썼더니 그 유명한 석학 제임스 커렌(James Curran) 교수가 자신도 울었다면서 제자를 의심한 얘기를 하더군요. 과제를 못 내서 핑계 대는 줄 알았다면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