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이 세운 정암 조광조 추모비. 양팽손이 처음 조광조의 무덤을 쓴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이른바 조대감골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남명은 남달리 총명한 두뇌를 갖고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각종 서책을 읽어 소화하고 20살에 생원·진사 양과에 1, 2등으로 급제하였다. 다음 해에 실시된 생진회시에는 나가지 않고 문과회사에서는 낙방하였다. 소과(小科)는 일시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요 출사의 길이 아니라 해서 소과는 포기하고 문과만 응시한 것이다.
"남명은 좌류문(在柳文)을 좋아하고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문이 아닌 고문으로 시권(詩卷)을 써서 시관들을 놀라게 하고 그 글은 사람들이 전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을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언병가가 멸문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다." (주석 3)
꿈이 많고 박학다식했던 그에게 조광조와 숙부의 죽임은 절망적이었다. 기묘사화는 모처럼 작동하기 시작한 사림정치의 이상을 송두리째 제거하는 정치폭력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선사회는 고루한 훈구파의 독무대가 차려졌다.
훈구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이후에 수 차례에 걸쳐 책봉된 250여 명의 공신 그룹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세조는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공신그룹 뿐만 아니라 종실 세력과 지방의 사림들을 끌어들였다. 여기에 세 세력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단종복위 운동이나 남이(南怡)의 옥으로 종실세력이 제거되고 4대사화로 사림세력이 제거되었다. (주석 4)
사화기 말엽에 해당하는 그의 생존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 혼탁한 시기였다. 연산군의 방탕, 중종기 이후 훈구 관료의 사림에 대한 음해, 외척들의 발호로 인한 사림의 피화(被禍) 등이 당시 상황을 탁박하게 하던 시기였다. 남명은 그러한 시대분위기에서 명리추구 의식을 떨쳐 버리고 지리산 자락에서 속진에 오염되지 않은 채, 학문 연마와 후진 교육에 일생을 바침으로써 당대의 사림계로부터 숭앙을 받아왔다. (주석 5)
주석
1> 이성무, <남명 조식의 생애와 사상>, <남명학보> 창간호, 78쪽, 남명학회, 2002.
2> <남명조식선생 행장 및 사적>, 남명학연구원, <남명학연구논총(제1집)>, 362쪽, 1988.(이후 <행장 및 사적> 표기)
3> 앞의 책, 362쪽.
4> 이성무, 앞의 책, 87쪽.
5> 윤사순, <천인관계에 대한 남명의 사상>, <남명학보>, 창간호,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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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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