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요여국현 시집
우리시움
"새벽마다 산 위로 해 뜨는 곳
저녁마다 천 위로 달 뜨는 곳
갈대들은 한결같이 동쪽으로 나란했다
사방 불어오는 바람에 무람없이 흔들려도
마땅한 제 방향으로 고개 숙이며 서있는
겨울바람 속 천변 갈대들에게 배운다
우리 사는 일
우리 사랑하는 일 다름 아님을
흔들리고 비틀거려도
마땅한 제 방향으로 고개 두는 것임을"
- 갈대에게 배우다, 중에서
시인에게 동쪽은 마땅한 제 방향이다. 한없이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흔들림도 마땅한 것이며, 그 흔들림 끝에 바라보고 선 동쪽도 마땅한 것이다. 활자중독자이자 독서선동가 김미옥 선생님은 여국현 시인을 '연민의 시인'이라 부른다. 아니나 다를까, 시편을 읽다 보면 "마땅함"으로 표현된 방향이 곧 "사랑"이고 "연민"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바라보고 꽃과 풀, 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따뜻한 눈물이 있다.
"천변 텃밭 모종과 모종 사이
기다랗고 가는 곧은 작대기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위로 크는 족속들 옆으로 눕지 말라고
모진 바람 불어도 꺾이지 말고 삐뚤어 크지 말라고
제 길 제 시간 따라 꼿꼿하게 크라고
가늘고 곧은 작대기들이 제 몸 내어 길 받쳐주고 있다
나는 누구의 모종이었으며
나는 누구의 곧은 작대기일 수 있을까"
- 모종과 작대기, 전문
'선생님의 가방'에 나오는 시인의 스승처럼, 시인에게는 그를 지탱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그가 해를 보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온몸으로 작대기가 되어준 사람은 어머니다. '모종과 작대기'는 스스로도 작대기가 되어 누군가의 삶을 해의 방향으로 지지하겠다는 진실된 소망이 적혀있다. "엄마 없이 그 시집 나왔겠는가 / 고마워요 (엄마와 시, 중에서)"라고 말하는 사랑으로, 그는 넘치게 받은 사랑을 지금도 시로 흘려보내고 있다.
"영어는 까막눈에 상 까막눈이고
내사 마 뜻도 하나도 모르지만
한글은 띄엄띄엄 읽을 줄 아니 한글만 안 읽나
그러더니 돋보기를 고쳐 쓰고
내 석사논문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는 엄마
아들 이름 박힌 종이뭉치 아들인양
머리맡에 두고 읽는 그 마음 아득하여
우리 엄마 다음엔 박사논문 읽으시겠네
안 하던 너스레를 떠는 명치끝이 아릿하다"
- 엄마와 시, 중에서
누구에게나 치열하게 싸워온 자기 자신만의 전쟁터가 있지 않겠는가. 고군분투하며 걸어온 발자국 속에서 다른 이들의 발자국까지 헤아리는 연민의 마음이 시편 곳곳에서 읽힌다. "엄마 그때 기억나?(그때, 중에서)"라고 묻지만 이제는 답하지 않아도 되는 그때의 포한들이 아리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선 시의 소리가 곡哭소리를 내면서도 아름답게 곡曲을 부르고 있다.
"자유로운 그대를 사랑으로 옥죌 수 없어요
그대를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이 되는 길뿐이지요
바람의 노래 시를 마음만 뻗쳐 품을 수 없어요
시를 품는다는 것
내 삶이 시가 되는 길뿐이지요"
- 사소한 진리, 중에서
시인은 세상을 마냥 낭만적으로 포장하지는 않는다.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순간도 있음을 "호박넝쿨" "포식자들" "세 마리 비둘기가 전하는 우화" 시편들을 통해 분명히 직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쪽을 향해, 해를 향해, 마땅한 제 방향을 향해, 차가운 눈 속에서도 노랗게 꽃피는 복수초처럼 온몸으로 새 길을 여는 역성逆性을 노래한다.
에필로그에서 시인은 "서둘지도 조급하지도 않을 터이다. 가끔 그 길 위에서 나란히 앉아 저녁노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분들 만난다면 그로 족하다"라고 말한다.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의외로 힘을 다 빼고, 저녁 때 되면 물드는 노을같이 물흐르듯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저녁을 따라 노을이 오듯, 가을을 따라 낙엽이 물든다. 나 스스로가 사랑의 길이 되면 사랑이 따라 걷는다. 이토록 사소한 진리를 우리는 자주 잊는다. 당연한 사실대로 살면 손해 보는 것만 같아서, 상대방이 먼저 사랑해 주길 바랄 때가 많아서 그렇다.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당연해지고, 조금만 더 마땅해져 보자.
들리나요. 사랑이 나를 따라걷는 소리가.
들리나요
여국현 (지은이),
우리詩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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