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6일 2024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한 고사장
대전교육청
임마누엘 칸트가 그랬다던가.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흡사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논쟁 같지만, 지금 이곳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에 대입하려면 이렇게 비틀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나쁜 사람이 나쁜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나쁜 제도가 나쁜 사람을 만든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둔 지금 고3 교실은 더 이상 '교실'이라고 할 수 없다. 분명 시간표는 있는데, 교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진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사 일정에 맞춰 수업을 해도 집중해서 듣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고3이 더는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차라리 3학년 2학기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고3 교실엔 여러 종류의 수험생이 뒤섞여있다. 오로지 수능에 목매단, 이른바 '정시 파이터'와 논술과 면접을 준비하는 아이들 그리고 정원 채우기도 힘든 지방 사립대에 지원해 합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릴없이 소일하는 아이들이 따로 또 같이 지낸다. 대입 전형의 종류도 방식도 시기도 천차만별인 탓이다.
학교마다 교육과정을 편제할 때, 웬만해선 고3엔 상대평가로 등급을 산출하는 주요 과목을 개설하지 않는다. 내신과 수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는 고충을 덜어주려는 학교의 배려다. 공부하는 데 부담이 적은 절대평가 과목인 만큼 오로지 수능에만 매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고3 아이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수업도 아니고, 자습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면 좋겠다는 아이도 있다. 마땅히 할 게 없는 아이들의 선택지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뿐이다.
수업뿐 아니라 시험 때도 요지경이다. 고3 1학기 때까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결시생이 교실마다 넘쳐난다. 아파서 시험을 치를 수 없다고 이유를 대지만, 친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2학기의 시험 기간에 맞춰 아픈 건, 고3의 '특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과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50분의 시험 시간 중에 문제를 푸는 시간은 10분, 나머지 40분은 취침 시간이다. 코를 골며 자는 아이들 사이에서 시험 감독을 하는 게 데면데면할 지경이다. 힐끗 답안지를 보면, 문제를 푸는 아이보다 찍는 아이가 훨씬 많다는 걸 대번 알 수 있다.
"차라리 3학년 2학기가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대입에 성적이 반영도 안 되는데, 굳이 시험을 치르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재수, 삼수를 불사한 '정시 파이터'들만 따로 모아 치르게 하면 안 되나요?"
아이들의 불만 가득한 반문에 "많이 힘들지?"라는 뻔한 위로로 답변을 대신한다. 물론,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쥐고 흔드는 현행 대입 제도가 수십만 아이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 주범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어제오늘의 일이냐는 무력감에 모두 손을 놓고 있을 따름이다.
"대입 제도를 찔끔찔끔 손볼 게 아니라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할까요?"
한 아이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에 뜨끔했다. 그는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부모와 교사, 선배에 이르기까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만 되뇔 뿐, 대입 제도를 '고정 상수'로 여기는 게 의아했단다. '폭탄'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후대로 떠넘기는 모습이 무책임하다는 거다.
대입 제도를 없애자는 그의 말은 하소연에 가까웠지만, 시급하고도 유일하며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과거 모든 정부에서 대입 제도 개선을 비롯한 교육 개혁을 추진했지만, 용두사미에 그쳤거나 되레 개악되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교육 개혁의 실패와 좌절은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집단적 무력감을 배태한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 점진적인 교육개혁은 여론의 완고한 '관성의 태클'을 이겨낼 수 없다. '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역대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천착하고 시도해 온 대입 제도의 개혁이 실패했다면, 또다시 새로운 제도를 고안할 게 아니라 아예 없애는 게 옳다.
대입을 폐지해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