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학생들, 1919년 이후 최대 항일 투쟁

[오늘의 독립운동가 55] 1929년과 1930년 전국 학생들

등록 2024.11.04 09:18수정 2024.11.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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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교대, 광주자연과학고 교정의 학생독립운동 기념 조형물
(왼쪽부터)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교대, 광주자연과학고 교정의 학생독립운동 기념 조형물정만진

11월 3일이면 '광주'가 떠오른다. 5월 18일처럼 그렇게 떠오른다. 5월 18일과 11월 3일은 2월 28일, 3월 1일, 3월 15일, 4월 19일, 5월 16일, 6월 10일, 7월 17일, 8월 15일, 8월 29일, 10월 26일, 12월 12일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몇 날들 중 하루들이다.

아직도 5월항쟁을 폄훼하는 '국민'들이 한둘이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들의 끝없는 집요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무정치적 또는 탈정치적 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소설가의 〈소년이 온다〉를 두고 '역사 왜곡'이라며 스웨덴 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인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 세상일에는 신경 꺼라!"

그런 풍토 탓에,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학생의 날'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에 도열한 채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데 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쓸데없이 기웃대지 말고 오직 공부에만 집중해야 한다! 알겠느냐!" 식 훈화를 많이 들었다.

11월 3일은 학생들이 공부 대신 독립운동을 한 날이라 해서 '학생의 날'로 지정되었는데, "불의를 보면 일어설 줄 알아야 대한민국의 학생입니다. 선배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이겠지요?"식 격려가 아니라 "공부나 해!"라니, 참으로 뜬금없는 교육 훈화다.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진 학생독립운동

여전히 '학생의 날'에 엉뚱한 훈화를 듣는 학생들이 있을 성싶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4년 전인 2020년 11월 3일에 비교적 상세한 기사를 써서 널리 일린 적이 있으므로 필요한 독자께서는 그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법하다. (관련기사: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항쟁 "광주학생독립운동")


1927년 2월 15일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단일 전선 결성을 구축했다. 신간회(新幹會)였다. 광주 학생들도 1926년 11월 3일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이래 일제에 맞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전국 신간회 결성, 광주 성진회 조직


1927년 2월 광주사범학교 기숙사생 150명이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4월 불온한 강령과 토의 사항을 내걸고 '전라북도 기자 대회'를 진행한 혐의로 기자 대표 6명이 구속됐다.

6월에는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 등 8명이 〈조선독립선언문〉 배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광주고보 2·3학년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동조 동맹휴학 투쟁에 돌입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께 나주역에서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와 스에요시(末吉克己) 등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3학년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 일로 한일 학생 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일제 순사들이 몰려와 한국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구타했다.

일본 국왕 생일에 맞춰 대규모 투쟁 벌이기로

광주 학생들은 성진회 창립 3주년인 11월 3일이 일본 국왕 생일 메이지절(明治節)과 일치하는 데 착안, 그날 메이지절 기념식 후에 진행될 신사 참배 거부를 시작으로 항일 투쟁에 돌입하기로 계획했다.

오전 11시께 신사 참배 후 돌아오던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보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일단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집회를 열어 가두 시위를 결의, 300여 명이 목봉과 검도 도구 등을 들고 오후 1시께 시내로 진출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이 가세하고, 광주여고보 학생 일부도 가담하였다. 거리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박수와 고함으로 지지를 보냈다. 시위대는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지만 경찰과 소방대 등에 가로막혔다.

11월 12일 다시 가두 시위, 170여 명 투옥

11월 3일 가두 투쟁으로 광주고보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명이 구속되었다. 학생들은 11월 12일 제2차 시위를 벌였다. 2차 시위로 광주 학생 170여 명이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일제는 광주 학생들의 독립운동 소식이 다른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가까운 목포, 나주, 함평 등지부터 시위가 일어났고,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 학생 1만2000여 명이 가두 투쟁을 벌였다.

소식을 들은 함흥, 원산, 신의주, 평양, 개성, 진주, 대구, 부산, 전주, 제주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1930년 1월 개학 후 시위는 다시 온 나라로 확산되었다.

3월까지 계속된 학생 독립운동에 전국 320개 학교, 당시 중등학교 이상 재학생 8만9000여 명의 60%인 5만4000여 학생들이 '광주 학생 운동'을 벌였다. 1642명이 구속되고, 582명이 퇴학당하고, 2330명이 무기정학에 처해졌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 민족항쟁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부 1층의 현충 시설(왼쪽), 기념탑에서 나래로 내려본 건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부 1층의 현충 시설(왼쪽), 기념탑에서 나래로 내려본 건물정만진

광주 서구 학생독립로 30번지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다. 뿐만 아니라 각 학교에도 기념 조형물이 있다. 과연 광주다운 면모다.

학교마다 독립운동 조형물, 자랑스러운 광주

전남여고(동구 제봉로 158번길 8)에 '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와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상(像)'이 있고, 광주일고(북구 독립로 237번길 33), 광주자연과학고(북구 능안로 30), 광주교대(북구 필문대로 55)에도 각각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광주일고 기념탑 앞면에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외침이 새겨져 있다. 피끓는 학생이기에 '술 권하는 사회(현진건)'에 저항해 궐기한 것이다. 11월 3일 각 학교의 훈화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가 아니라 "학생은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독립운동 #현진건 #광주학생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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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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