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걸린 두 여자 이야기

이모, 저세상에서는 부디 행복하세요

등록 2004.10.24 13:58수정 2007.06.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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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떡장수로 아들 셋을 힘겹게 키운 이모는 여든셋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모의 늙고 병든 몸을 살갑게 보살피는 사람이 없었던 최근 몇 년 간 이모의 외로움은 더욱 컸던 것 같다. 거기에 지난해 초부터 이모에게 치매 증세가 있다며 자식들 간에 이를 두고 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모는 결국 지난해 추석 무렵 몸져 드러누워 바깥 세상의 밝은 햇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안에서 하루 종일 천정만 바라보다 그렇게 임종을 맞게 되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을까? 난 이모님의 마지막이 너무나 불쌍하고 또 불쌍해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과 포항으로 향했다.

가난한 살림으로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키도 크고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했던 이모는 어린 내 눈에도 엄마보다 훨씬 예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러나 고생의 흔적은 얼굴과 온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젊은 시절 너무나 곱고 예뻤을 이모의 얼굴엔 굵게 패인 주름이 검은 피부에 깊게 골지어 있었다. 선이 가는 이모의 체형과는 달리 손은 거칠어 투박했고 내 손가락의 두 배로 느껴질 정도로 굵은 손가락은 마디져 그녀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이모를 꽤나 좋아했다. 이모 역시 당신 동생의 딸들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신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뒤던 이모는 아직도 올망졸망한 아이 여섯을 키우고 있는 동생을 위해 서울로 와 몸이 약해 학교 옆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작은 언니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엄마 역시 포항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 길로 달려가 아무에게도 의논할 이 없는 외로운 이모의 힘이 되기도 하고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 서울과 포항이라는 가깝지 않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이모는 그렇게 자매의 깊은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의가 좋고 서로 헌신적으로 돕는 처지의 엄마와 이모였지만 나이가 들고 각자 노년의 삶을 살게 되자 오가는 일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형제들도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지는 못해도 그 지역에 갈 때는 이모를 찾아뵙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모는 우리들에게 가깝고 따뜻한 분이었다.


재작년 나는, 이모의 손자 그러니까 당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걸음도 걷기 힘든 엄마를 모시고 포항에 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경주 보문단지의 한 호텔로 갔다. 두 분께 좋은 곳에서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주변 구경도 시켜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엄마의 치매 상태는 당신의 언니와 도란도란 옛 얘기를 못 나눌 정도였지만 자매는 모처럼 한 방에서 잠을 자며 평화로운 얼굴이 되었다.

다음날 호텔 식당에서 맛난 음식도 사 드리고 온천 사우나에 가서 두 분 모두 깨끗이 몸을 닦아드리기도 했다. 두 여자의 몸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때를 밀던 아주머니조차 '노인의 몸이 어쩜 이렇게 탱탱하냐'고 말할 정도로 엄마의 몸은 윤기가 있었지만 이모의 몸은 살이라고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뼈에 가죽만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가끔 호텔 투숙도 해 보았고 고급 식당도 다녀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모는 단체 관광 경험밖에 없던 듯 싶었다. 이모는 딸이 없어 외롭다는 한탄을 밤이 새도록 내게 했었다.

재작년에 이어 지난해 초, 엄마는 '이모가 자식들 구박을 받고 있다'는 상상에 사로잡혀 포항 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졸라 난 결국 휴가를 내고 엄마를 모시고 예전과 같은 경주 호텔에서 이모를 만나기로 하고 그곳으로 갔다.

막내 오빠와 함께 호텔에 들어선 이모의 모습은 몇 달 전 결혼식 때 만난 때와는 달리 거의 노숙자의 모습처럼 변해 있었다. 옛날부터 아프다며 고통스러워했던 다리는 아예 절기까지 했다.

파마를 하지 않은 백발의 머리는 누워있다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한쪽은 짓눌려 있었고 또 한쪽은 쭈뼛이 올라가 있었다. 고동색의 누비 점퍼는 외출복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을 뿐 아니라 누비바지에 털신을 신은 모습은 이모의 지금의 상태를 웅변해 주는 듯했다. 몸이 불편해진 이모는 보살핌을 받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모는 평생 안 쓰고, 안 먹고, 안 입고 꼭꼭 챙기며 사신 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려 하지 않았고 주지도 않았다. 서른 청상과부가 아이 셋을 키우려 그리 악착같이 살았을 터인데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외고집이라 치부했던 것이다. 한평생 살아온 방식을 노년에 바꾸기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들과 모두 소원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외고집으로 살았을 이모가 자식들과의 관계가 그리 가까울 리 없었다.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며느리와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어머니, 거기에 더해 아들까지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야 더 말해 무엇을 할까.

이모를 좋아했던 난 젊은 날의 고생으로 키운 자식이 이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이 팔순 노인이 고집을 조금 피운다 한들 그냥 받아주면 될 것을….

이모가 치매 증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상태와 비교하면 너무나 정상이었다. 이모는 오히려 엉뚱한 말을 하는 엄마를 멀뚱히 쳐다보며 "자, 와 저라노?"하며 치매 상태를 구분할 정도의 판단력을 지닌 것이었다. 한마디로 당시 '이모의 치매기는 치매 3년이 된 엄마'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자식들은 그 정도로 미미한 치매 초기의 상태마저 마치 중증 치매 환자인양 이모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런 오빠와 올케에게 나는 '무조건 받아주라'고 당부를 했고 엄마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나를 보는 이모는 자신에게 딸이 없어 그렇다며 또 서러워했다.

그 이후 이모는 밤마다 집으로 전화를 해 왔다. 아들이 자신의 저금통장을 뺏으려 한다고도 하고 집에 몰래 들어와 쌀이며 다락에 쌓아둔 물건들을 훔쳐가고 있다고도 상상하여 당신 자식을 원망하는 말들을 하였다. 무언가 도움을 달라는 간절한 메시지에 나는 몇 마디 위로밖에 할 말이 없었다.

저녁 여덟시가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하였다. 이모님 영정을 마주하는 순간 눈물이 복받쳐 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이모 얼굴이 엄마의 얼굴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칠순에 찍었다는 이모의 얼굴은 환하고 주름도 없었다. 고생 한번 하지 않은 듯 곱게 나이든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이모의 친정쪽 친척들이 속속 모였다. 강원도 외삼촌의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가 왔고 포항에 살고 있는 엄마의 친척 언니뻘 되는 이모의 아들인 순식이 오빠와 동생도 왔다. 몇 년 만에 모두 한자리에 모이니 서로 그동안 안부를 묻는 얘기가 끝이 없었다. 지난날 어린 시절 얘기까지 나오자 나중엔 무슨 잔칫집 분위가 되었다.

옛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는 자주 만나자며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얘기를 하던 중 나는 이모님 앞에서 눈물져 울다 돌아서서 웃고 있는 나의 모습에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래서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고 하고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거구나'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이모의 영정 사진이 저만치 마주 보였다.

'이모, 힘겨웠던 이모의 지난 한 평생 모두 잊고 저 세상에서는 부디 행복하세요.'

난 이모가 저승에서나마 외롭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모의 영정을 마주보고 있자니 너무나 많이 후회됐다. 이모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를 만나게 해 드리지 못한 것도 마음이 아팠고 엄마와 포항이모 그리고 강원도 외삼촌 이렇게 살아계신 세 분을 모시고 고향 김천에 모시고 가지 못한 것도 그러했다.

난 이모가 어찌 돌아가셨는지 묻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떻게 생활하셨는지도 묻지 않았다. 치매 걸려 똥오줌 싸고 누워 있는 노인의 삶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은 안 보아도 , 안 들어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모의 인생이 초라했던 것에 비해 발인이 있던 날의 아침 햇살은 너무나 화려했다. 평생 그렇듯 외로운 삶을 살았던 이모였지만 온 산이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시월에 이 세상을 훨훨 날아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이모 세대는 일제 식민지와 6·25를 거치며 역사적으로도 불행하여 대부분 평생 고생을 한 세대기도 하다. 가난한 집의 딸로 커서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간 그들은 가난한 시대의 운명까지 겹쳐 하루 살기에도 급급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거기에 남편의 따뜻한 정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것 또한 닮은 자매의 삶은 고단함 자체였다. 자식들과 먹고 살겠다고 떡이나 생선을 머리에 이고 시골 산길을 걸어 다니며 팔았던 언니와 머리카락을 잘라 자식들의 먹을 것을 사야했던 동생의 삶은 그렇게 비슷한 색깔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지 5년이 된 엄마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모의 마지막 삶은 너무나 달랐다. 엄마는 치매에 걸려서야 당신이 자식들에게 베푼 사랑을 작게나마 되돌려 받고 있는 반면 치매에 걸린 이후 이모의 삶은 외로움에 더해 고독만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를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부모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평생을 살면서 어떤 아픔과 어떤 상처가 남아 있는지 작은 관심이라도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부모님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듯 나의 부모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내 부모가 주인공인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 본다면 내 부모가 모순과 억지가 다소 있다 하더라도 조금은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모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 그녀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엄마가 '언니가 보고 싶다'며 포항을 가자고 보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 그것이 난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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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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