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60점 맞던 감격의 순간!

한글 공부 따로 않고 초등학생 된 아들과 그 엄마의 고민

등록 2006.12.18 22:19수정 2006.12.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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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 ⓒ 배지영

우리 아이에게는 따로 한글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학교 들어가기 전, 유치원에서 받아쓰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했는데 아이는 30점이나 40점 맞았다. 하지만 책을 읽을 줄 알고, 자기 생각을 얘기할 줄 알아서 점수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면, 유치원과는 다르게 일찍 끝난다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빈 집에 혼자 들어가지 않게, 혼자 밥 먹지 않게, 갑자기 비 오는 날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학부모가 될 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돌봐주실 분을 구하고 아이와 의논해서 그 분을 '고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모는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모두 업어 키운 '옛날 큰언니'처럼 우리 아이를 돌봐주셨다. 덩치가 작은 편인 우리 아이가 맞고 오면 고모는 "제규야, 코를 한 대 팍 쳐버려. 그러면 끝난다" 라고 하셨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우리 아이랑 다른 아이랑 투덕거리면 다음 날에 그 아이한테 "우리 제규랑 사이좋게 놀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아이는 혼자서 고모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도 가고, 영어 학원에도 걸어 다녔다. 반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고, 우리 집에 아이 친구가 놀러오기도 했다. 이 뿌듯한 시기에 내 노동 강도는 한 해 전보다 2배 정도 세져 있었다. 남편까지 매우 바빠서 아이의 알림장과 필통 속을 살피는 것도 큰일이었다.

5월,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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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잘 맞은 받아쓰기 60점, 평범(?)한 20점 ⓒ 배지영

4월 말, 아이네 반 엄마 모임에 갔다가 다른 아이들은 받아쓰기 점수는 100점이 기본, 실수하면 90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유치원생일 때부터 한글 쓰기는 '마스터' 했다는 거였다. 그 때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받아쓰기 하자고 아이와 나 자신을 들들 볶는가 하면, 어느 날은 나도 좀 살자고 모른척 했다. 받아쓰기 보기 전날인 목요일 밤마다 행복하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학부모가 된 선배들은 이제라도 아이를 보습학원에 보내라고 했다. 나는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자기 이름 석 자만 알고 학교에 들어갔지만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잘만 따라갔다는, '전설 속의 아이들' 중 한 명이 우리 아이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던 5월, 일이 바빠서 주말에 시댁에 아이를 맡겨놓고 돌아선 지 2시간 뒤에 아이 발목이 부러졌다는 연락이 왔다. 그 날 바로 입원해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붓기가 가라앉아 통 깁스를 해서 퇴원할 날을 기다렸다. 어머니와 아이 돌봐주시는 고모가 번갈아 병원을 지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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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형 자전거 뒷바퀴에 발이 끼어서 발목이 부러진 아이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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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혼자 걷고, 뛰고, 까부는 것은 완전히 소중한 행위라는 걸 알게 됐다. ⓒ 배지영

아이가 높은 베개에 깁스한 다리를 올리고서는 '마님'처럼 이것저것 시키는 것도 고마웠다. 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었고, 얼굴을 다칠 수도 있었다. 발목이 부러진 건 하찮은 불행이었다. 아이가 혼자 오줌 싸고, 이빨 닦고, 걸어 다닌 것은 완전히 소중한 행위였다. 아이가 걸을 수만 있다면 받아쓰기는 영영 잘 하지 못한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9일 만에 퇴원한 아이는 깁스를 한 채로 학교에 다녔다. 반 친구들이 소꿉놀이를 하러 운동장으로 나간 날은 혼자 교실에 남아 있기도 했다. 목발 짚는 게 서툰 아이가 교실에서 급식실까지 오가기 힘들어서 밥 먹는 시간이면 아이 큰 엄마, 아이 고모, 아르바이트 학생까지 동원해야 했다. 공교육은 받아쓰기 못하는 아이를 대할 때처럼, 다리가 불편해진 아이에게도 붙박이 가구처럼 한자리에만 있었다.

"엄마, 나는 받아쓰기 때문에 살 수가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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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럼틀을 탈 때면 눈을 감고 드러누워 타는 아이. ⓒ 배지영

아이는 6주 만에 걷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책가방을 챙기고, 식탁에 수저를 놓고, 혼자 옷을 입던 습관은 사라져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한 공포는 금요일마다 닥치는 받아쓰기 시험이었다. 아이는 목발을 짚지 않고 학교에 가서 첫 받아쓰기 시험을 본 날, 휠체어에 앉아서 첫 운동회를 구경한 날 보다 서럽게 울었다.

"엄마, 나는 받아쓰기 때문에 살 수가 없겠어!"

아이는 그 뒤로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고모가 몇 번이나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다. 소아과 선생님은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하셨단다. 나는 자책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그 전에 아이가 네다섯 살이 되었을 때, 왜 한글 떼는 학습지를 시키지 않았을까? 그래놓고서 왜 다른 친구들은 다 100점 맞는다는 유치한 비교를 했을까?

퇴근하고 집에 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 있는 아이를 보는 날이 많았다. '받아쓰기 못해도 다그치지 말아야지'를 날마다 다짐했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탈 때면, 누워서 팔베개를 한 채로 눈을 감고 타는 아이 사진을 자주 들여다봤다. 아이의 자유로움을 위해서는 나 스스로 받아쓰기 압박에서 풀려나야 했다. 내 마음이 많이 편해진 날, 아이에게 물었다.

"완소 제굴(아들 제규의 애칭)! 네가 생각했을 때 받아쓰기는 몇 점이 잘 한 거야?"
"60점."
"그럼, 2학년 올라가기 전에 딱 한 번 해 볼래?"


아이는 진짜로 60점을 맞았다. 나는 받아쓰기 점수를 사진 찍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사람들은 받아쓰기 점수도 훌륭하고, 아이 글씨가 반듯한 게 예술이라고 칭찬해 줬다.

나는 명필 한석봉의 엄마가 된 것처럼 "밤마다 제규 옆에서 떡 썰잖아"라고 농담을 할 만큼 느긋해졌다. 아이는 내가 퇴근하면 처음 초등학생이 되던 무렵처럼, 책을 읽거나 딱지를 치거나 종이를 접다가 잠들었다

한 번으로 그친 받아쓰기 60점,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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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스스로 쓴 글. 시험이 아닐 때면 틀린 글자가 별로 없다. ⓒ 배지영

받아쓰기 60점은 한 번으로 그쳤다. 아이가 느낀 영광의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받아쓰기는 아이가 젖을 떼거나 똥오줌을 가릴 때처럼, 존재감도 없이 퇴장할 거다. 분명히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 저녁이면, 푸하하하 웃으면서 받아쓰기 시험 점수를 본다.

"제규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너, 60점 맞았다고 잘난 척 하니까 금방 20점 맞잖아."
"알아. 나도 다음에는 잘 할 거야."


아이에게 즐거웠던 순간은 짧아도 강렬하다. 그래서 언제나 괴로워서 더 길게 느껴졌던 시간들을 이겨버린다. 친구와 다투고 나서도 금방 화해를 해서 놀 줄 알고, 받아쓰기를 못한다거나 학교 갈 준비를 꾸물꾸물 한다고, 나한테 야단맞고 상처 입은 것도 티 내지 않는다. 아이는 지금, 받아쓰기 60점을 낙관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가면을 쓰고 있다. 어느 날에 내 본성이 튀어나오면, 받아쓰기처럼 아이가 아직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치사하게 끄집어낼 수도 있다. 아이를 흔들 수도 있다.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인간은 유일하게 격려 받아야 하는 동물이라는 것, 사랑은 그 사람이 바라는 대로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주는 거라는 현자들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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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카이사르, 옥타이비아누스 이야기를 읽고 혼자 쓴 글. 이럴 때면 틀린 글자가 없다. ⓒ 배지영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덧붙이는 글 '2006, 나만의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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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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