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DJ의 정치 참여 제의를 거부한 이유

[보수 대해부 2부-논쟁④] '최초의 지하철 파업' 이끌었던 배일도 의원②

등록 2007.02.07 08:36수정 2007.02.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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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배일도 한나라당 의원

배일도 한나라당 의원 ⓒ 오마이뉴스 남소연


"노동운동이 변화하지 않으면 수구가 된다"

- 올해는 87년 6월항쟁 20주년이다. 배 의원에게도 87년은 서울지하철노조 결성 등으로 아주 각별했을 것 같다.
"당시 사회적 슬로건은 독재타도와 호헌철폐 두 가지였다. 군부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87년 6월투쟁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과 독재체제를 지키려는 구세력, 군부세력의 충돌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단결권 등 노동자의 기본권이 폭넓게 현실화된 시기였다. 그때 서울지하철노조도 결성된 것이다. 87년 6월항쟁은 민주적 권리의 쟁취와 실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한국사회에서 80년대는 노동운동의 절정기였다. 배 의원도 서울지하철노조를 결성하고(87년) 사상 최초로 지하철 파업(88년)을 이끌었다. 80년대 노동운동은 배 의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나에게 직접 미친 영향은 해고되고, 징역간 것으로 나타났다(웃음).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 노동운동은 현재 어떤 의미로 축적돼 있나?
"그 이전에는 개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87년을 거치면서 노조라는 조직틀 속에서 생각하고 활동하게 됐다. 노동문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면서 살아가게 됐다. 그것이 일상화됐다. 또 지금 여기(정치인)까지 오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됐다."

-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 계기'라는 얘기인가?
"노조운동을 한다는 것은 동료의 문제를 공유하고 사회나 직장의 문제를 인식한다는 걸 뜻한다. (인식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국가의 문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활동(노조운동 등)이 자연스럽게 정치로까지 이어졌다."

- 노동운동을 할 때도 정치 할 생각이 있었나?
"89년엔가 DJ가 평민당 총재였던 시절 정치 참여 제안을 받았다. 87년에는 민주진영이 분열됐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정치적 자유 등을 요구해서 성공했지만, 담당자들의 준비부족으로 기성정치권에 기댔다. 그 결과 그것은 양김의 분열로 나타났고 실의와 패배에 빠졌다. 이런 속에서 세력을 구축하던 양김측에서 정치 좀 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동운동이 자리잡지 않으면 개인이 정치권에 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뜻을 정치권에 전달했다. 당시 나 자신도 정치할 준비가 안돼 있었다. 정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운동권 인사들의 '사상전향'이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배 의원도 '투쟁 중심의 강성 노동운동가'에서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온건(합리적) 노동운동가'로 전향한 것 아닌가?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 변화를 고정적인 것이나 지나치게 본질적 것으로 보면, 그 변화에 부응해서 활동하는 것을 변절이나 변신으로 본다. 나는 노동운동이 변화하지 않으면 수구, 나쁜 의미의 보수가 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은 진보운동이기 때문에 변화해야 한다고 봤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없었던 87년 이전과,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된 87년 이후는 다르다.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변했다는 것이다. 옛날(87년 이전)에는 국민이 투표해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도, 노동3권도 없었다. 군부독재는 체육관 선거로 정치적 요구를 억압했다. 그에 비해 (87년 이후에는) 노동3권이 부분적으로 허용되는 등 법과 제도가 많이 바뀌었다.

또 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이 몰락했다. 이와 함께 고르바초프로 대변되는 세계적인 개방·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그때부터 변화를 얘기했다. 또 우리가 한번도 겪지 못했던 IMF는 노동운동에 공황기다. 과거는 권리든 (임금 등) 경제적인 것이든 단결된 힘을 통해 그쪽에 요구하는 것이 정의의 실현이던 시대였다. 이제는 있는 걸 내줘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누구의 잘못이든 공황기의 노동운동이라는 조건이 우리 앞에 있었다.


(과거에는) 대립과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적, 세계적 조건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 생긴 변화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까지 동시에 부여했다. 87년 이전에는 우리의 요구와 주장이 정의일 수 있었다. 국민의 동의도 받았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되고 (IMF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국민은 '너희도 너희만의 요구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요구를 책임져라'고 노동계에 요구해왔다. 대립적 노동운동을 떠나서 협력하는 한 주체가 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하는 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극적인 주창자에서 사회의 일주체로서 당당히 책임지는 (노동)운동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공존의 노사관계'라고 이름 붙였다."

"노동운동 내부보다 자본이나 권력과의 싸움이 오히려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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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 이것은 전향인가, 변절인가? 아니면 다른 표현이 가능한가?
"그런 걸 변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시대변화에 맞는 운동의 변화라고 본다."

- 자연스러운 변화인가?
"운동은 사회적 조건에 대한 반응인데 조건 자체가 바뀌었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처지에서 보면 여기(조건의 변화)에 부응해 새로운 노동운동을 세우려는 세력들을 변절자로 바라볼 수 있다."

- 실제 배 의원을 '변절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노동운동은 진보운동이다. 그래서 진보의 의미와 내용을 제재로 파악해서 과거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변화된 조건을 활용해서 자유·평등·행복이라는 본래의 목적,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시대변화를 너무 가볍게 보면 안된다."

- 무엇이 생각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나?
"우선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부여받지 못했던 체제가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직선제가 됐다. 노동법도 바뀌면서 노동3권이 부분적으로 보장됐다. 또 90년 후반기에 IMF라는 독특한 상황이 왔다. 이것은 한 국가가 잘못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 흐름 속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즉 국가주도형 개발독재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운영원리, 개인의 삶까지 다시 재점검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준비가 안된 우리 사회는 구조조정, 특히 인력비용 조정으로만 이것을 해결하려 했다. 당시는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기업도 노동운동도 이것을 편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IMF가 우리에게 던진 교훈은 더 이상 과거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닥쳐왔는데 이걸 위기상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장기표 선생이 당시에 새로운 변화를 얘기하면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고, 김지하씨가 생명사상을 얘기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운영원리를 마련하기 위해 기초부터 다시 세워보자는 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단선적 대립구조가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게 됐다."

- 88년 해고된 이후 10년간의 해고자의 신분으로 살았다. 본인도 해고 이후 사상적 방랑을 거쳤다고 고백했는데 '해고'라는 개인적 상황이 생각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나?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이인제 장관이 노동부장관이 됐을 때 '신한국 건설'을 내세우면서 구질서에 저항했던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겠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제가 복직이 안되자 아버지가 이를 비관해 자살했다. 해고된 후 우유배달도 하고, 시장에서 장사도 해봤다. 노동인권회관에도 있었고 전해투에서 18일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87년 노조를 결성했던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효한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 당시에 무엇이 배 의원을 가장 힘들게 했나?
"우선 해고됐으니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문제가 불안으로 남았다. 그 다음엔 노동운동 내부에 선이 자꾸 그어져 분열되는 것이 나에게 상당한 괴로움을 줬다. 분명히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논의하고 토론해서 새로운 실천을 만들 수 있다고 봤는데 뒤늦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후배들은 그런 부분을 수용하기보다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변절 등으로) 규정짓고 단정해 나를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다."

- 결국 외부 및 내부와 싸움하다가 지쳐버린 것인가?
"그렇다. 지난날의 상대, 즉 자본이나 권력과의 싸움은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노선을 놓고 다투는 등 (운동) 내부의 분열은 나를 힘들고 어렵게 만들었다."

- 스스로 "많은 것을 잃었다. 형제와 같았던 노동계 지인들은 저를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는 이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노동운동 내부의 비판이 가장 힘들었나?
"나는 노조를 설립한 사람이고 징역에도 갔다 왔다. 내가 서울지역노조협의회(서노협) 의장일 때 단병호 의원이 부의장, 심상정 의원이 사무처장이었다. 천영세 의원은 지도위원이었다. 제 해고문제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또 정치권의 요구가 있었음에도 제가 정치권에 가지 않고 노동계에 남아 있었다.

서노협과 지하철노조 세운 사람이 (노동운동의) 변화를 얘기했으면, 노동운동에 절박한 무언가가 있어서 저런 얘기를 하겠지 하며 한번쯤 경청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냥 무대포로 어용이다, 변절자다, 이렇게 얘기할 때는 섭섭했다. 당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은 나에게 변절했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87년 열려진 공간 속에서 뒤늦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후배그룹들이 나에게 (변절자니 어용이니 하는) 딱지를 붙였다.

내가 노동운동 1세대로서 고민 속에서 얘기한 것인데 충분히 알아보려 하지 않고 '자본의 품에 들어가려고 했다'면서 변절을 얘기할 때 참 힘들었다. 징역 살 때나 해고될 때보다 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노동운동 후배그룹이 나에게 변절자·어용 딱지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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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 서울지하철에 복직한 뒤 무파업ㆍ무분규ㆍ무쟁의를 선언해 노동운동 내부에 논쟁을 일으켰다. 당시 '어용' '변절' 등이 비판이 뒤따랐는데, 그 선언은 10년 사상적 방랑의 결과물인가?
"새로운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봤을 때 그런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있을 것으로 봤다. 노동의 상대편에 자본이 있다. 이 자본을 어떻게 바라볼 거냐?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과거에 자본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문명사적 전환기에 있는 지금은 자본을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대립주의가 아니라 공동번영의 관계로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가야 하는 기제가 마련됐다. 나는 이것을 '무쟁의'라고 이름붙였다. 이것이 99년 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이 되고, 2000년 1월 4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더 이상 우리는 시민의 발을 묶는 파업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 지하철노조는 제가 해고된 동안에 대립적 노사관계에 기초해 회사측과 싸웠다. 매일 파업한다고 해서 '파업철'이라며 노조만 욕얻어먹었다. 이러면서 지하철 경영은 매년 꼴찌였다. 그러면 경영자들은 밖에서 '우리는 경영을 잘하려고 하는데 노조가 맨날 파업해서 경영이 이 모양'이라며 경영부실의 책임을 노조에게 떠넘겼다.

또 지하철의 납품비리나 인사비리 등이 일상화돼 있었다. 이런 비리를 저지른 세력이 잘못을 드러내놓고 치유받기보다 파업을 통해 그런 것들을 묻어버렸다. 그러니 매년 경영평가에서 꼴등이고 시민의 교통편익의 질은 나빠졌다. 그래서 파업을 통해 문제해결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진짜 경영의 실체가 드러날 것 아니냐? 즉 파업도 안하는데 왜 경영이 이 모양이냐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노조는 원래 싸우는 조직인데 왜 당연한 권리인 노동3권을 포기하느냐' '자기 목적(욕심)을 위해 회사와 짜고 무쟁의 선언한 것 아니냐'는 등 얘기가 있었다. 물론 파업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기회만 되면 회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 상황을 선언적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밖에서는 왜 싸워야 하는데 그러냐며 변절자니 어용이니 몰아붙였다. 난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싸움의 기술을 발휘해서 잘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싸워서 해결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IMF가 우리에게 요구해온 지점이다. 어떻게 잘 싸울 거냐, 잘 굴복시킬 거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 지금 시기는 비정규직 폭발적 증가 등 80년대 이상으로 엄혹한 노동상황이다. 그런데 투쟁보다 대화, 타협, 양보만을 주장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그럼 싸운다고 해결될 거냐? 그거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투쟁으로) 간다고 하면 그것은 싸움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싸워도 해결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시대변화에 맞는 사회운영 원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차별의 문제다. 그 다음에 남용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차별이 없도록 민주노동당이 사용사유를 제안하자고 했다. 정규직 채용은 비용이다. 그러면 어디로 가냐 하면 여기서 기업 할 수 있는데도 중국으로 가버린다. 이게 자본의 세계화다.

싸우면 싸울수록 해결책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실업의 확대, 노동조건의 악화로 나타날 것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정규직문제 해결에 대해 강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본측을 압박해서 강제로 법을 만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보호법 만들어놨지만 얼른 해고해버리지 않나. 거리에 (일할 사람이) 널려 있다는 것 아니냐. 누가 정규직을 얘기했느냐? 자본이다. 옛날 기업체 모집 광고를 보면 점심제공, 학자금 대출 등의 유인책을 쓴다. 지금은 비정규직을 쓴다 해도 생산성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기업, 국민, 대공장 노조, 정규직, 비정규직 등이 네덜란드 폴더모델처럼 합의해야 한다. 그런 조건을 정부가 만들어야지 보호법이니 해서 법으로 강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정규직이 자본의 사악함이고 신자유주의가 일반화되면서 발생했다? 정부가 그런 데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비정규직문제도 해결 못할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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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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