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라면 한 봉지조차 구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강기희
추억하고 싶은 일보다 추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가슴에 안고 가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일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질기게 따라붙은 가난이라는 꼬리를 떼어내지 못하는 한 삶은 그래서 처연하다.
이런 글은 쓰지 않으려 했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이는 일이 있어도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끝내 간직하다 스스로 소멸할 때까지, 그것이 날선 칼날이든 단단한 돌덩이든 상관치 않고 가슴 한구석에 놓아두고 싶었다.
그럼에도 작심하고 그때의 일에 대해 쓰는 이유는 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낸 한 여성에 대한 측은지심을 풀어놓기 위해서이다.
가난한 소설가의 삶까지 마비시킨 IMF
@BRI@작년에 펴낸 장편소설 <개 같은 인생들>은 그 시절 다가올 나의 앞날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몇 년 후의 내 모습이었다. 병들어 죽은 내 육신이 쓰일 곳은 해부학 교재 실습용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와 오랜 세월 동안 가정을 이루며 함께 살았던 여인의 마지막 절규가 그러했으므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리라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죽음>을 즐겨 읽었으며, 일급 자살가인 실비아 플러스의 삶이 담긴 <자살의 연구>란 책을 자주 뒤적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그렇게 우습게 죽어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시기의 내 마음을 소설에 담았다.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시린 발을 감춰가며 작품에 몰두했다. 한 달 후 나는 자살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시인이 죽은 사회>를 문학지에 발표했다.
몇 달 후 그 소설을 읽은 한 여인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와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작품 속에 들어있는 '우리 집 약도'라는 시를 보고 내 집을 찾아왔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설 속 인물이 현실로 살아나는 상황이라니. 그때부터 나는 소설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철 8호선 남한산성 역에서 논골 방향으로 371걸음
버스는 중앙병원 앞 정류장에서 338걸음(건널목 건너 좌측으로)
평균 경사 38도(북한산 오르는 것보다는 힘들지 않음) 정상에서
두 번째 집(붉은 벽돌로 된 2층 건물) 반지하 셋방 철문에 내 이름이
조그맣게 붙어 있음
만일 집을 찾지 못할 경우에는 동네 입구에 있는 슈퍼에 가서 머리 길고
콧수염과 턱수염 난 놈 집을 물어보면 됨(외상값이 있기에 기억하고 있을 것임)
혹시 주인이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냐 물으면 글 쓰는 놈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당부함(주인은 날 점쟁이로 알고 있음)
(단편소설 <시인이 죽은 사회>에 수록된 시 '우리집 약도' 전문)
10여 년 전 나는 누구처럼 IMF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해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잘나가던 사업이 망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에도 낡은 컴퓨터를 가슴에 끼고 소설 작업에 빠져 있었다. 한번 시작하면 최소 1년은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었다. 하는 일이 그러하니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그러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IMF는 서서히 내 목을 조여왔다. IMF는 종이 값의 급등을 불러왔고, 출판사는 계약했던 책 출간을 포기했다. 된서리를 맞은 출판계는 회생의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다.
400자 원고지에 쓴 소설 원고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검토만 한 달이 걸리는 시스템이 급한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원고지로 쓴 마지막 소설이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원고라 허투루 다룰 수도 없었다.
반지하 셋방은 언제나 세상을 절반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골목을 지나치는 이들의 모습도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이의 입은 옷만 봐도 그가 어느 집에 사는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만 들어도 누가 밤업소로 출근하는지, 퇴근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반쯤 열린 세상에서 온전한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그래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반지하 방은 겨울임에도 귀뚜라미가 방바닥을 뛰어다녔다.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면 귀뚜라미가 먼저 폴짝 뛰었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늘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심하게 우는 날엔 보일러 기름이 떨어졌는가 하고 보일러부터 점검해야 했다. 기름값 폭등으로 보일러는 먹을 것을 달라며 자주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냈다.
봉지쌀로 연명하던 시절, 탈출구는 공공근로
일상이라는 게 무력하다 싶었다. 사는 게 고작 이런 건가, 하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대책도 없고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날 재주도 없었다. 당연히 소설 작업도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쌀도 동네 쌀집에서 한 되씩 사 먹었으니 그 처지가 한심하기도 했다.
그 무렵 '공공근로'가 생겨났다. 저 일이라도 잡지 못하면 겨울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에 공공근로 신청을 하러 갔다. 신청서가 금방 동날 정도로 신청자는 많았다. 신청자가 많으면 다음 기회로 미루어질 수도 있다는 구청 직원의 말이 귓전에 걸려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구직 희망 직종이 많았지만 나는 '어린이집'이라 썼다. 아이들에게 동화책도 읽어주고 글쓰기 교육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며칠을 기다리니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구청으로 나오란다.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맞춰 구청 강당으로 가니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 중 절반은 여성들로 나름대로 멋을 부린 모습이고, 나머지는 나처럼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름대로 멋을 부린' 여성들은 어린이집 원장들이었고, 나머지는 나와 같은 심정을 지닌 구직자들이었다. 구직자 중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았다. 어린이집 원장들은 학부모처럼 강당의 뒷자리에 앉았고, 구직자들은 갓 입학한 아이들처럼 앞자리에 모여 앉았다.
구청 직원이 한 사람씩 호명하면 그 사람은 크게 대답했고 어김없이 한 여성이 데리고 갔다. 그렇게 호명은 계속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힘차게 대답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나를 데리러 오는 여성은 없었다. 구청 직원이 어린이집 이름을 대며 원장을 찾았지만 원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간 자리에 나 혼자만이 강당에 남았다. 구청 직원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여 또 기다렸다. 기다리는 그 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기다리니 웨이브 머리를 한 여성이 강당으로 들어왔다. 처음 강당에 있던 여자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글쎄, 싫다니까요. 저런 사람을 데려가서 어디다 쓰겠어요."
원장이 나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원장의 탁한 음성이 가뜩이나 불편한 내 심기를 건드렸다. 여자의 손끝이 나를 향했지만 설마 내게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구청 직원이 원장을 달래듯 말했다.
"뭐가 어때요, 일만 잘하면 되지."
"긴 머리에다 지저분한 수염까지. 어휴, 난 싫어요."
원장이 머리를 흔들면서 진저리를 쳤다. 그때서야 나는 원장이 나를 보고 '저런 사람'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원장의 언행에 화가 났지만 좀 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구청 직원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원장은 '다른 사람을 구해달라'고 말하고는 강당을 빠져나갔다.
"강기희씨가 맘에 안 든다네요. 애들이 그런 모습 보면 놀란다나. 거참. 다른 직종을 찾아 보셔야겠네요."
구청 직원이 되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럴 것 없다며 씁쓸하게 웃어주었다. 팔려가지 못한 건 내 책임이지 구청 직원 책임은 아닌 것이었다. 구청 직원이 희망직종이 적힌 서류를 들고 왔다.
여러 직종 중에 '야간방범'이 눈에 들어왔다. 낮시간엔 작업하고 밤에 근무하면 생활과 작업을 병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류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발걸음은 족쇄를 찬 듯 무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