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는 왜 10개월만에 추락했나

[이병선의 일본리포트③] 성난 민심 읽지 못한 정권의 '관념성'

등록 2007.07.30 12:17수정 2007.08.0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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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총리.
아베 신조 총리.<오마이뉴스 재팬> 요시카와 타다유기
민심은 무서웠다. 높은 인기를 구가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사실상 직접 후계자로 지명해 정권을 넘겨줬던 아베 신조 총리는 성난 민심의 파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 헌정사상 사실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라는 혹독한 현실이다. 그 동안 여당이 참의원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마다 무소속 당선자를 영입하거나 연립정권을 구성해서 극복해왔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성향이 전혀 다른 공산당이나 사민당, 그리고 자민당이 스스로 내친 국민신당에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참의원 제1당인 민주당의 협력을 얻지 못하면 원만한 정국운영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높은 인기를 이어받아 지난해 9월 60%가 넘는 높은 지지율로 출발했던 아베 정권이 왜 이렇게까지 추락하게 됐을까?

'돈'과 '생활'에 분노한 일본 유권자

<아사히신문> 정치부 데스크 와타나베 쓰토무씨는 ▲국민연금 기록의 허술한 관리문제 ▲양극화의 심화 ▲각료들의 잇단 정치자금과 관련한 스캔들 등 국민을 분노시킨 3가지 문제가 겹치면서 자민당이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문제가 하나나 둘이었다면 이런 결과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노 소스케 정권의 퇴진을 몰고 왔던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소비세 인상 ▲농수산물 수입자유화 ▲리쿠르트 스캔들 등 3가지 문제가 겹치면서 자민당이 36석밖에 얻지 못하는 사상 최악의 참패를 기록했다.


도쿄 시내에 나붙은 참의원선거 후보자 공고 게시판.
도쿄 시내에 나붙은 참의원선거 후보자 공고 게시판.<오마이뉴스 재팬> 요시카와 타다유기
국민연금의 허술한 관리문제는 지난해 연말부터 불거졌다. 가뜩이나 연금 재정의 고갈로 노후 연금을 정상적으로 탈 수 있을지 불안해하던 일본인들은 안일한 행정으로 자신들의 연금납부 기록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아베 총리는 "사회적 불안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쉬쉬했다. 이 것이 사사건건 '관료주의'에 맞서는 자세를 보였던 전임자 고이즈미와 대비되면서 국민적 실망과 분노를 불러왔다.


국민연금 관리문제가 도시민들의 분노를 샀다면 양극화 확대 문제는 지방민의 반발을 불렀다. 일본은 6년째 경기회복 국면이 지속되고 있지만, 도시-지방, 정규직-비정규직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통계에 나타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이 문제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각료들의 잇단 정치자금과 관련한 스캔들은 아베 총리의 인사 책임으로 귀결됐다. 작년 12월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비용 유용문제로 사임했을 때만 해도 이 문제가 이렇게 아베 정권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5월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성이 똑같은 문제로 궁지에 몰리자 상황은 보다 심각해졌다. 그는 결국 여론의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런데 그의 후임으로 임명한 아카기 노리히코 농림수산성도 똑같은 문제가 드러나 추궁을 받고 있다.

<도쿄신문> 정치부 기자 사사카세 류지씨는 "결국 '정치와 돈' 문제가 아베 정권을 몰락시켰다"고 말했다. 정치와 돈이 결부된 문제는 유권자의 감성을 쉽게 자극하는 법인데, 아베 정권에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민심이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국민생활' 제쳐두고 '이념'에 매달린 아베 정권

오마이뉴스 한은희
아베 정권이 이런 국민의 생활과 결부된 문제들은 뒷전에 미뤄놓고 헌법개정이나 교육기본법 개정 같은 '이념적' 문제에만 매달려온 것이 이번 선거의 주요한 패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야마구치 지로 홋카이도대 교수는 "아베 정권이 주요 정책으로 제시한 헌법논의나 교육정책은 추상적인 관념론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주요 관심사는 연금기록·격차확대·정치자금 등 한결같이 '돈' '생활'과 연관돼 있는데도 아베 정권은 초점을 잘못 맞췄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를 깨닫고 공식 선거운동에 들어가서는 개헌 문제 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등 변화를 꾀했으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이번 선거 결과로 인해 아베 정권이 목표로 내걸었던 '2010년 개헌' 추진 일정은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러나 개헌의 방향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참의원 제1당이 된 민주당 안에는 오히려 자민당 의원들보다 더 적극적인 개헌론자가 수두룩하다.

전후 최연소 총리인 아베 정권의 화려했던 등장과 10개월만의 극적인 추락은 민심의 위력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민심의 소재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자산을 승계한 정권이라도 순식간에 몰락할 수밖에 없다.

정치지도자의 미래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민심의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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