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승숙
청도 우리집에서 경산까지 70리도 더 되는 길을 걸어서 갔다 하였다. 중의 적삼에 핫바지를 입은 차림 그대로 경산 모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고 한다. 근 팔백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던 운동장은 먼지가 자욱하더란다.
아버지는 운이 좋아서 미군부대에 배치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화려한 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매끼 고기로 배를 채우게 되었으니 군생활 반 년도 안 되어서 키도 크고 장골이 되어 버리더란다.
그 당시 우리 한국 군대는 부정과 부패가 심해서 군인들이 늘 배를 곯았단다. 위에서 이리 떼먹고 저리 잘라 먹어서 정작 군인들은 먹을 게 없고 입을 옷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군들을 만나면 불쌍해서 봐줄 수가 없더란다. 다 떨어진 옷에 군화라고는 볼 수도 없었고 헌 고무신짝을 끌고 다니더란다. 하도 굶고 잠을 못 자서 한국군들은 전투할 힘도 없었다고 한다.
홀로 지내는 외로움에 병은 깊어가고
그렇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평안도 영변의 청천강을 건너기도 하고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건너뛰기기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혼자 지내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외롭지 않았다. 아버지 주변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놀러 다닐 일도 많았고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들은 한 분 두 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이제 동네에는 안어른들만 남아 계신다. 몇 분 계시는 바깥어른들도 대부분 병중이시다. 아버지 역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시다. 그래서 아버지는 종일 있어봐야 말 한 마디 나눌 사람도 별로 없이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 지내시게 된 것이다.
외로움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일 지도 모른다. 날마다 홀로 지내는 그 외로움 때문인지 아버지는 점점 약해지셨다. 한 해가 다르고 한 달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