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같아서 주는 팁, 친구 같아서 주는 팁?

[아르바이트의 추억]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만원의 팁'

등록 2008.07.11 14:09수정 2008.07.1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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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화점 화장품 코너가 고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0년이 막 시작된 겨울이었다.


수능시험을 치른 나는 친구들과 함께 백화점 지하식품 매장에서 난생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3월에 있을 대학교 입학식 때까지 노는 것보다는 용돈이라도 버는 것이 더 낫겠다는 심산이었다.

설날 대목을 앞두고 있던 백화점은 연일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백화점은 손님들의 씀씀이와 진열된 상품의 수준부터 남달랐다. 특히 '과연 누가 저 돈 주고 생선을 살까'라는 내 생각을 비웃듯 수백만 원짜리 굴비세트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주로 방학이나 휴학기간을 이용해 단기간 용돈을 벌려는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식품매장 아르바이트는 조별로 임무가 나눠져 있었다.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이 사용한 카트를 수거하는 '카트조'와 지하주차장에서 백화점 납품업체 직원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지하조', 그리고 물건을 많이 구입한 손님들의 무거운 쇼핑백을 주차장까지 대신 들어다주는 '배달조'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아르바이트생들은 '카트조'를 선호했다. '지하조'처럼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에서 납품업체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고, '배달조'처럼 무거운 짐을 들 필요도 없는 가장 쉽고 무난해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트조'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며칠 되지 않아 아쉽게도 '배달조'로 발령(?)을 받았다. 내 아쉬움을 눈치 챈 '배달조'의 아르바이트생 형이 "여기 일도 어렵지는 않아, 그리고 우리는 가끔 부수입도 생기니깐 하는 일에 비하면 우리가 수입이 가장 많아"라며 웃었다.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들 같아서 주는 거야"

'배달조'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일은 힘들지 않았다. 손님 짐을 대신 들고 같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직접 실어주면 그만이었다. 대부분 팔 힘이 약한 아주머니 손님들의 짐을 들어다줬다. 함께 짐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보면 역시나 독일이나 일본 등에서 물 건너온 값비싼 외제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한 아주머니 손님이 짐을 들어달라고 했다. 아직 사회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양 손에 든 짐이 무겁기보다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야하는 그 어색한 시간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민망한 나와 달리 그 아주머니는 평소에도 자주 아르바이트생에게 짐을 들어달라는 부탁을 해보셨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차라리 나도 그게 편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2~3분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으니까.

"학생은 몇 살이야?"
"네,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요"
"어디 고등학교 다녔는데?"
"○○고등학교요."
"정말? 우리 아들도 거기 나왔어.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회사 다녀. 그럼 우리 아들 후배네. 한창 놀 시간인데 이렇게 아르바이트도 하고 기특하네."

갑자기 아주머니가 지갑을 열더니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주셨다. 순간 당황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건 '수고비', 혹은 '팁'이라는 것인가. 아르바이트도 처음인데 역시 처음 받아보는 팁이라 당연히 꺼려졌다.

"아니에요. 저 여기서 월급 받아요."
"아이고 얼마나 받는다고 그래. 내 아들 같아서 주는 거야. 용돈 해."

아주머니는 내 셔츠 앞주머니에 직접 돈을 넣어주셨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던 나는 어찌할 수도 없었다. '이게 바로 그 형이 말한 부수입이구나.' 아직은 순수(?)했던 나는 그날 근무가 끝나고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던 매니저 직원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순수(?)했던 터라, 어감 자체도 너무 어색한, 술집에서나 주고받는 것으로만 안 그 '팁'이란 걸 내가 받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매니저의 반응도 나를 당황하게 하긴 마찬가지였다. 매니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웃으면서 "괜찮아, 그냥 받아, 안 받으면 오히려 손님들이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빠하거든, 좋잖아, 용돈도 받고"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만원의 팁'

일을 할수록 팁도 늘어갔다. 특히 손님이 많은 주말에는 더 그랬다. 그 때 내가 받던 월급이 80만원 정도였는데 한 달간 받은 팁만 무려 20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어느새 익숙하게 팁을 받는 내가 신기할 때도 있었다.

부끄럽지만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평소보다 짐이 무겁거나 왠지 팁을 줄 것 같아 보이던 손님이 팁을 안 주고 그냥 가면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역시 '사람 욕심은 끝이 없고, 사람 변하는 것도 한 순간'이라는 어른들 말씀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였나 보다.

내가 일하던 '배달조'는 일이 끝난 후 근무복을 갈아입으며 "오늘은 어떤 손님이 팁을 얼마 주더라"라는 대화를 하면서 서로 받은 팁을 자랑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샌가 팁에 익숙해졌다(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렇게 처음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있던 중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학생이었는지 한 손에는 두꺼운 전공 서적을, 다른 손에는 물건이 가득 든 쇼핑백을 들고 있던 예쁜 여자 손님이 나에게 주차장까지 짐을 들어달라고 했다.

짐을 들고 내려가면서 전공 서적을 슬쩍 훔쳐보니 책 옆에 '99'로 시작되는 학번과 이름이 써있었다. 예쁜 얼굴만큼이나 이름도 예뻤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99학번 대학생인 듯했다. 학번으로 본다면 나보다 한 살이 많은 또래 손님이었다.

함께 주차장으로 가자 그 손님은 작고 귀여운 외제차의 트렁크를 열며 짐을 실어달라고 했다. 내가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잠깐만요"하고 나를 부르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좀 충격이었다. 이미 팁 받는데 익숙해졌다지만 순간 왠지 모르게 그 돈은 받기가 싫었다.

"엇,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그냥 받아요."

아직도 대화가 기억난다. 그 손님은 내 손에 직접 돈을 쥐어주더니 금세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떠났다. 팁을 주는 말투나 자세가 아주 익숙(?)해보였다. 평소에도 이런 팁을 많이 주는가 보다. 당황한 나는 돈을 돌려줄 틈도 없었다. 혹시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온 사람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일을 하며 많은 팁을 받아봤지만 나보다 겨우 한살 많은 내 또래 손님이 주는 팁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 때의 당황스러움과 가벼운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많이 했다. 그동안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부모님 품안에서만 커왔던 내가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차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무슨 차이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본다면 '내가 3~4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내 또래의 여자아이는 고작 3~4분 동안 짐을 들어줬다고 팁 혹은 수고비로 주는 차이'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주머니 손님들은 자기 아들 같고 기특해서 팁을 줬는데, 이 손님은 내가 힘들게 고생하는 친구 같아서 주는 팁인가? 어른들이 주는 팁은 아무런 마음의 불편함도 없이 달콤하게 잘 받으면서, 똑같은 만원인데 내 또래 손님이 준 팁은 씁쓸하게 받은 내 이중인격도 싫었다.

이제는 나도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 적지않은 월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난 내 짐을 잠깐 들어준 아르바이트생에게 만원이라는 '거금'을 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때문일까?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 만원의 팁을 잊을 수가 없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덧붙이는 글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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