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정확하게 잘 따라해 봐. 하우 두유 두!"
"하우 두유 두!"
"그 다음엔 자기소개를 해야지? 마이 네임 이저 00 김!"
"마이 네임 이저 00 김!"
"'마이 네임 이저'가 아이라 '마이 네임 이저'라니깐. 다시 해 봐. '마이 네임 이저 00 김'!"
"'마이 네임 이저 00 김'!"
"나 참 미치겄네. 이저가 아이라 이저라 캐도?"
"선생님! 그 놈의 갱상도 말투 좀 고칠 수 없어요? 선생님이 '이즈'를 '이저'라고 하시면서 우리 애 보고 자꾸 발음을 '이즈'로 하라고 하잖아요. 그만 됐어요. 발음도 제대로 못하시는 선생님은 필요 없어요. 학습지 선생님 노릇 제대로 하시려면 발음공부부터 먼저 하세요."
1986년 가을. 그해 추석이 지난 뒤부터 나는 서울 종로3가 낙원상가 옆에 있는 00교육원에서 초중학생 대상 국영수 학습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학습지 아르바이트'였지 세일즈맨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문배달처럼 정해진 집에 학습지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학습지 구독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학습지 구독을 받은 그날 아르바이트비가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한 달이 지난 뒤 학습지 구독료가 교육원으로 입금되어야 구독료의 20%를 떼 주었다. 사실, 그 교육원에서 신문에 모집광고를 냈을 때에는 분명 '학습지 아르바이트생 구함-월수 10만원 보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돈으로 월수 10만원이면 웬만한 회사원 월급의 4분의 1쯤 되는 제법 큰 아르바이트였다. 나는 그해 여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가을이 될 때까지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일자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런 내게 발품만 팔아 월수 1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그 구인광고는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엄악요? 엄악이 뭐예요?
"너 무슨 엄악 좋아하니?"
"엄악요? 엄악이 뭐예요?"
"내 참! 엄악도 몰라? 너 혹시 샘을 가꼬 놀라 카나? 노래가 엄악이잖아."
"아, 음악요. 근데요, 선생님께서는 왜 음악을 자꾸 엄악이라 그래요?"
"???"
창원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처음 시작한 학습지 아르바이트는 늘상 경상도의 억센 억양에다 'ㅡ'를 'ㅓ'로 발음하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ㅡ'를 발음하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도 한창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ㅡ'가 'ㅓ'로 발음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학습지 구독을 받느라 애를 참 많이 태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말이 너무 빠르다 보니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아무리 말을 천천히 하고 억양을 부드럽게 하면서 서울 말씨 흉내를 내려 해도 좀처럼 경상도 말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학부형이나 학생이 내 말투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이나 '네? 네?'하면 나도 몰래 열이 나 경상도 말투가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말씨의 높낮이도 문제였다. 처음에는 말 끝자락만 살짝 꼬부려 올리기만 하면 그럴 듯한 서울 말씨로 바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학부형이나 학생들의 귀에는 내 말투가 그럴싸한 서울 말씨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학부형은 내 말투가 충청도 말씨 같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내 말투가 강원도 말씨 같다고도 했다.
학습지 구독, 학부형 대문 따주기만 하면 50% 성공
'딩동! 딩동딩동딩동!'
"누구세요?"
"예. 학생 상담차 교육원에서 나왔습니다."
"교육청요?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게 있나요?"
"일단 문부터 먼저 따주시지요. 자세한 건 어머님을 뵙고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루는 학습지 구독을 늘리기 위해 신림동 어느 이층 주택에 어렵사리 들어갔다. 그 학부형은 내가 '교육'이란 말을 크게 하고 '원'자를 낮게 내뱉자 언뜻 해당 교육청에서 나온 선생님으로 착각하고 문을 따 주었다. 사실, 그 때 학습지 구독을 받으러 다니는 대부분의 세일즈맨들은 이런 방법을 자주 썼다.
학부형이 일단 대문을 따주기만 하면 50% 정도는 성공이라는 게 학습지 세일즈맨들 사이에 굴러다니는 유행어였다. 학습지 세일즈맨들은 대문이 열리기만 하면 무조건 들어가서 거실 안쪽에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말끝마다 '어머님! 어머님!'하면서 온갖 달콤한 말로 학부형을 구슬려 학습지 구독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툭 하면 나도 몰래 툭툭 튀어나오는 그 놈의 경상도 말씨 때문에 대문을 밀고 거실로 들어가더라도 학부형들에게 퇴짜를 자주 맞았다. 그날도 그랬다. 그 학부형은 내가 교육청에서 나온 선생님인 줄 알고 시원한 주스까지 내놓으며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몹시 궁금한 듯 눈을 말똥거리고 있었다.
"이 집 자녀분께서 저 아래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지요?"
"네. 제 아들은 길 건너 있는 00중학교에 다니고, 딸은 그곳에 다니죠."
"그럼 더 잘 됐습니다, 어머님! 사실은 어머님 따님 교육 문제 땜에 나왔지만 아드님이 중학교에 다닌다고 하니까 기왕 어머님을 만난 김에 같이 상담해 드리죠. 아드님과 따님 둘 다 국영수를 잘 합니까?"
"아들은 수학이 쫌 떨어지고, 딸은 영어를 잘 못해요."
"요저음(요즈음)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아아들(자녀들) 수학과 영어 땜에 사교육에 열을 바짝 올리고 있지요."
"네? 선생님 말씀이 너무 빨라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지요. 제가 경상도에서 이 곳 교육원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투가 좀 그렇거든예."
그날 나는 그 집 학부형의 나이를 어림짐작해 자녀들의 나이까지 대충 때려잡았다. 사실, 그 집 자녀들의 학교 또한 어림짐작으로 맞추었다. 또한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학부형들은 자녀들의 학교와 학년까지 스스럼없이 밝혔다. 게다가 학부형들과의 대화가 이쯤 되면 학습지 구독은 90% 성공이었다.
근데, 늘상 경상도 말씨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내 딴에는 천천히 부드럽게 꼬리말이 말려 올라가는 서울 말씨를 흉내 냈다. 하지만 학부형의 입에서 '네?' 소리가 몇 번 더 나오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당황해 꼬리말을 '요~'하면서 자연스레 말려 올리는 게 아니라 경상도 토박이 말인 '~예'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학부형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나는 속으로 '한 건 올렸다' 생각하며 학습지를 꺼내 들고 한창 신나게 설명을 했다. 그런데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학부형이 갑자기 "선생님 말씀을 반밖에 알아듣지 못 하겠어요"라며 자리에서 일어서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했다. 이쯤 되면 애써 대문을 열고, 애써 설명했던 학습지 구독은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그놈의 경상도 말씨만 아니었어도...
"구독용지 좀 주세요. 사실 선생님 말씀은 반밖에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선생님 인상이 좋고, 그 학습지도 괜찮은 것 같으니 구독은 할게요."
"어…, 어머님! 정말 고맙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 공부도 30분씩 봐 주신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어머님 자녀분들이 한 달 안에 성작이 쑤욱 오르도록 제가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제 아들과 딸이 선생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네요."
나는 그렇게 한 건 올렸다. 학습지 2권당 2만원(한 달 4주 8만원)이니까 매달 고정적으로 1만6천원이라는 아르바이트비를 번 셈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가르칠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이놈의 경상도 말투를 어떻게 감추느냐가 나의 가장 큰 숙제였다.
나는 그때부터 서울 말씨를 흉내 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쏟았다. 특히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 '~예'를 '~요'로 바꾸며 말꼬리까지 말려 올리는 연습을 참 많이 했다. 하지만 'ㅡ'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자꾸만 'ㅡ'가 'ㅓ'로 발음되는 것이었다. 내 꼬락서니는 선생은 '바담 풍'이라 발음하면서 아이들이 '바람 풍'이라 발음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학부형은 그렇게 4주가 지나가자 한 달 치 구독료를 내면서 나에게 다른 선생님으로 바꾸어줄 것을 요구했다. 애써 한 건 올린 학습지 구독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그 학부형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뒤에도 여러 학부형으로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경상도 말씨부터 먼저 고쳐라"는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의 학습지 아르바이트는 결국 그놈의 경상도 말씨 때문에 서너 달 동안 5만원도 채 벌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사실, 그때 내가 경상도 말씨를 극복했더라면 꽤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습지가 꽤 인기가 좋았으니까. 그 서너 달 동안 가정집을 어찌나 많이 돌아다녔던지 구두가 터지고 밑창마저 다 닳아 새 구두까지 한 켤레 샀다.
서울에서의 첫 학습지 아르바이트는 구두 값과 지하철비, 식비 등까지 합치면 -5만원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나는 그 학습지 아르바이트 때 서울 말씨를 피나게 연습한 덕택으로 경상도 말씨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나는 지금도 서울에서는 서울 말씨를, 고향에 내려가면 경상도 말씨를 당당하게 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글입니다.
2008.08.02 14:0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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