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학살참으로 부끄럽지만, 우리 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들이에요. 청연마을, 탄량골, 박산골 골짜기에서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죽였어요.
손현희
청연골, 탄량골에 이어 박산골에서도
거창양민학살 사건 희생자와 피해 내역 |
◎ 1차 학살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 앞 논들 희생자 - 84명 살아남은 이 - 6명(남자1,여자5) 재산피해 - 방화 75동 가축피해 - 27두(강탈 포함)
◎ 2차 집단학살 1951년 2월 10일 탄량골 골짜기 희생자 - 100명 살아남은 이 - 여자 1명 재산피해 - 중유리 196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60두 대현리 366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542두 와룡리 215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96두
◎ 3차 집단학살 1951년 2월 11일 박산골 골짜기 희생자 - 517명 살아남은 이 - 남자3명(문홍준, 신현덕, 정방달) 재산피해 - 과정리 109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76두 청수리 88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2두 덕산리 2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3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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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1951년 2월 10일),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끌고 '신원초등학교'로 연행해 오던 가운데 힘이 빠져 뒤처진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골짜기에 몰아넣고 또 다시 더할 수 없이 끔찍하게 죽입니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하고도 또 다시 시체 위에다가 삼대와 솔가지를 얹고 불까지 질렀으니, 그 악한 죄를 어찌 다 씻을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요.
또 다음날(1951년 2월 11일), 제3차 집단학살이 박산골 골짜기에서 있었는데 무려 517명이나 죽였어요.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들어간 마을(과정리, 청수리, 덕산리)마다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집짐승을 강제로 빼앗거나 또 죽이고,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아끌고
왔어요. 사흘 동안 무려 일곱 개 마을을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만들었답니다.
신원초등학교까지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800명쯤 되었는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24시간 동안 꼬박 갇혀 있었지요. 무엇보다 무서움에 떨며 실신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예까지 끌려오면서 뒤처진 사람들은 길에서 쏴 죽였으니 이 끔찍한 일을 본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두려움에 얼마나 떨었을까?
군인들은 이들을 데리고 박산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모조리 죽였어요. 그 가운데에 군경 가족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비참하게 죽어야 했지요. 또 두 시간 동안이나 확인사살까지 한 뒤에 시체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