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로운 진보의 다리가 되었다

[내가 만난 노무현] '노무현의 정치가 실패했다'는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세평에 동의할 수 없어

등록 2009.05.28 22:08수정 2009.05.2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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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일째 마음 한편으로 우울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방송이나 신문기사만 보아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머릿속에서 출렁거린다. 많은 애도와 추도의 글을 읽으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가슴 한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실, 1개월 전에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을 하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내가 상임이사로 있는 '사회디자인연구소'에서 1개월 전까지 <노무현정부 평가>를 진행하면서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퇴임 후 1년이 된 시점에 나온 <노무현시대의 좌절>이라는 책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비판적 평가 작업을 대강 마무리하고 있었다. 연구소의 성과물로 이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2개월 내에 책으로 엮어볼 요량이었다.

'노무현 시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역사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진지하게 책임 있게 진행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자임했다. 우리가 집권을 하려면 상대방의 실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실력으로 집권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명제를 세기면서 평가를 진행해 오고 있었다. 나름대로는 시중에 진보를 앞세우면서 무책임하게 비판하는 글에 일부 동의도 하고, 또 일부는 반박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진보'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실낱같은 희망을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연구소의 견해에 동의해 오는 정치세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께서 우리 웹사이트(좋은정치포럼 www.goodpol.net)에 종종 들르셔서 글을 잘 읽고 있다는 소식을 봉화마을 방문자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때마다 힘이 났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의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는 행복한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1주일에 대강 1편의 글을 쓰고 있었는데, 몇 주 전에는 글감이 떨어져서 '노무현 대통령과 검찰'을 주제로 글을 쓸까말까 망설이다가 'MBC 100분토론-진보가 보는 한국진보의 미래'라는 주제의 글을 쓰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 소환을 보면서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 검찰수사의 마무리를 보면서 정리해야 한다는 소심함과 수필의 글이 아니라 논문형식의 대안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쉽게 글을 쓰지 못했다.

막상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시자 너무나 후회가 된다. 내가 투표해서 대통령이 된 유일한 사람, 내가 선거운동을 했고, 나에게 정치를 가르쳐 준 사람, 그리고 구체적인 정치적, 정무적 판단에 대해 항상 나를 투덜이가 되게 만들어 버린 특별한(?) 사람, 노무현 대통령과의 추억을 일기와 메모를 보면서 다시 정리해 보았다.

노무현을 처음 만난 날, 2002년 2월 5일 14:00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 없다. 2002년 2월 5일이다. 만 1년을 근무한 참여연대를 2월 1일부로 정리하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하고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고려대학교 1년 후배인 안희정씨(현 민주당 최고위원)가 만나자고 전화가 왔다. 안희정 후배는 학생운동 때에 같은 조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그를 통해서 노무현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2000년 총선에 일산(을) 지역에서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하여 낙선한 직후에 정치적 방향을 놓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출마자 전원 낙선이라는 총선결과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은 민노당을 보고는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탈당을 결심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선거에 당연히 낙선했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그때 '바보 노무현'이 탄생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많은 지지자가 모인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러한 현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안희정 후배가 "형! 노사모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자발적으로 후원도 하고 대단합니다"하면서 설명 반(半), 자랑 반(半)할 때도 그냥 한 귀로 흘러들었다. 선거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후, 참여연대를 다니게 되었을 때, 가끔씩 안국동에 있는 '지방자치경영연구원'이 있는 '공간' 빌딩에 놀려가기도 했다.

2002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내가 참여연대를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하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수라청'이라는 한식집에서 점심을 하자고 해서 나갔다. 이미 1년 전부터 노무현 캠프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던 김철이라는 후배랑 같이 나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지금 보니까 딱히 할 일을 정한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우리 사무실에 형이 있을 책상을 마련해 놓겠으니, 오늘부터 같이 일합시다"하면서 반강제의 결단을 요구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화로 "지금 갈 거니까 책상정리하고 깨끗하게 치워놓아라!"하고 직원들에게 지시까지 하면서, 우스꽝스럽지만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게 예우를 갖추는 형식을 취했다. 안희정 최고위원은 노무현 캠프를 실무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당시는 지방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

여의도 금강빌딩 3층에 '지방자치경영연구원'이라는 사단법인의 이름과 함께 경선캠프로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구경할 겸해서 곧바로 따라갔다. 좁은 복도식 칸막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무실을 만든 구조였다.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회의실에서 녹차를 한잔하고 있는데,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를 찾으려고 회의실에 들어왔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공식 직함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었다. 사무실 문패도 상임고문실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선예비후보로 등록되기 직전이라 직함이 애매모호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안희정 후배가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활동하게 된 김두수씨입니다"라고 소개해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노대통령은 "아! 그래요. 잘 부탁합니다. 열심히 뜁시다"라는 짧은 손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을 나갔다. 바쁘게 뭔가를 찾고 있는 와중에 인사를 하게 되어 아주 짧은 10초 동안의 악수만 나누게 된 것이다. 그 날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의 시민사회보좌역이라는 임시 명함을 받게 되었다. 사무실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할까 역할분담과 조정을 한 결과,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경선조직의 국민경선팀장을 맡기로 했다. 국민경선팀을 1팀, 2팀으로 나누고 지역조직은 1팀으로 해서 나가 맡고, 직능 단체조직은 2팀으로 해서 강영추 선배가 팀장을 맡기로 했다. 국민경선팀장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노무현 후보와 악수하고 "잘 부탁합니다. 열심히 뜁시다"라는 말을 나눈 지, 한 달도 안 되어 경남 창원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발생했다. 나의 형인 김두관 남해군수가 경남도지사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처음에는 4월 말까지 민주당 대통령 경선을 끝내고, 5월부터 경남도지사 선거를 도와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2월 18일 경에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한다는 창원에 갔다가 너무 실망하고 말았다. 기자회견이 엉망진창이었다. 내 눈으로 볼 때, 이 기자회견은 너무도 준비가 안 된 기자회견이었다. 그 때 모른척하고 지나갔으면, 대통령 예비경선에 뛰어들어서 노무현 후보의 탄생을 함께 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를 소개한 안희정 후배와 주변에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남에서 열심히 뛰면, 결과적으로 김두관 후보도 잘 되고, 노무현 후보도 잘 될 것이니, 경남에 조직원을 파견한 셈 치라고 농담을 던지고 경남으로 보따리를 싸 내려갔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에 동참하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했다.

노무현을 두 번째 만난 날, 2002년 10월 5일(토) 18:00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가 9월 30일 공식적으로 발족하고 10월 5일 토요일을 맞이하여 선거운동 관계자 전원이 북한산 등산을 갔다. 4.19묘지에서 출발하여 대동문, 대남문을 거쳐서 구기동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북한산 성벽에서 기념 촬영도 하고 구호도 외치면서 기분 좋은 산책을 겸하는 등반대회였다. 구기동으로 하산하여 몇몇 식당으로 삼삼오오 들어가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게 되었는데, 마침 노무현 대통령 후보 내외분이 같은 식당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연히 같은 식탁에 마주 앉게 되었다.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씩 하면서 등산의 후일담을 나누었다. 권여사는 오래간만에 등산을 하였는지 종아리가 아프다면서 "이렇게 긴 등산 코스를 짠 것은 실무자들의 음모예요"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보다 권여사께서 주위를 더 편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신 것 같았다. 정말 소탈한 서민, 평민의 부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 통성명을 하다 보니 식당의 주인아저씨가 '부산 상고' 출신으로 노후보의 10년 정도 선배였다. 내가 보기에 식당 주인이 처음부터 '부산상고' 출신이라고 하지 않고 묵묵하게 음식만 날랐던 것은 노무현 후보의 처지와 연관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그 시절, 우여곡절 끝에 겨우 선대위가 발족되었지만,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정몽준 후보보다 더 떨어져 있을 때였다. 지지율이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일이 있는 후보라서 그런지 열광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당선가능성이 희박한 안타까운 후배라고 생각해서인지 처음에는 그저 손님으로만 대했다. 후보 내외분의 소탈한 말씀에 분위기도 좋아지고, 화기애애해 지면서 악수도 하고 후보의 사인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무현을 세 번째 만날 날, 2002년 10월 15일(화) 19:00

9월 30일 선거대책위원회가 발족되고, 정치개혁추진위원회에서 실무를 맡게 되었다. 10월 15일 밤 7시에 조순형 위원장, 신기남 본부장, 천정배 총괄간사, 김택기의원, 이목희 위원장, 윤석규 실장, 실무자로 김철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노무현 후보와 간담회를 했다.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진행하기 전에 후보 단일화 문제로 토론을 했다. 당시 주요한 선거방향을 잡기 위해 토론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서울 지역 활동을 마친 노무현 후보에게 신기남 본부장이 면담을 요청하여 성사가 되었다. 저녁식사를 겸하여 여의도 광장 건너에 있는 한화빌딩 지하 일식집에서 약 2시간에 걸친 토론이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식사자리에 들어오시더니,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했다. 내가 "후보님! 언론에 담배 끊어 신 걸로 보도가 되었는데, 괜찮겠습니까?"하자 노무현 후보는 "끊기로 했으니, 딱 한 대는 봐주지 않겠습니까!"하면서 참 맛있게 담배를 피웠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의 만남에서도 한 개비씩 담배를 찾아던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그날 정개추 위원들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신기남 본부장이 기조발언을 통해 정치개혁을 중심으로 강력한 드라이브를 요청했다. 정개추가 앞장을 서면 자신은 따라가면서 지원하겠다고 했다. 후보가 앞장을 서야한다는 정개추의 생각과 너무 강한 주장은 부담스럽다는 후보의 입장과 선거본부의 다양한 입장을 조정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조율되는 과정이었다. 토론 마지막에 나도 끼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후보님! 후보 단일화 요구에 너무 수세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보는 긍정적 여지를 두는 발언을 하고, 선거대책본부는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분리해서 대처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면, 형님 도지사 선거를 돕느라고 3개월 창원에 있었는데요. 저번 지방선거의 패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후보께서 영남에 목숨을 걸었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선은 영남표가 결정합니다. 저희가 영남에서 시작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할 테니 후보님께서 수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선거운동본부를 부산에서 발족식을 하고, 둘째로 선거운동본부를 부산으로 옮겨서 지역주의와 정면으로 대응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무현 후보가 말씀하셨다.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는 반대 견해 등 여러 의견이 있으니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런다고 영남이 쉽게 저에게 표를 줄까요? 선거는 근거를 두고 나머지를 공략해야 합니다. 영남으로 가서 활동한다고 표를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고 라고 하면서 노후보는 선거본부를 옮기면 실무적으로도 애로사항이 발생할 수 있고, 이런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기 때문에 지역주의 역풍도 우려된다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수도권 개혁표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표를 움직이는 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나의 과격하고 파격적인 제안을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셨다. 후보는 YTN토론회 준비로 일어섰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 종반에서 정치개혁추진위원회의 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선거 기조의 문제였다. 선거본부 내에 2개의 큰 흐름이 대립하였다. 노무현 후보가 선거 종반에 어떤 선언을 할 것인가를 놓고 상당히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하나는 남북평화선언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치개혁선언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2002년 12월 17일, 대국민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필요하다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포함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정치개혁선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치개혁추진위원회 안을 채택한 것이다.

노무현을 네 번째 만난 날, 2004년 5월 29일(토) 19:00

나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후보로 일산(을) 지역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에게 패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5월 29일에 17대 국회의원 당선자와 중앙위원을 청와대 만찬장에 초대했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와 돌아가면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낙선의 상처를 안고 우울하게 보내는 나날이었지만 그날은 무척 즐거웠다. 모두말씀에서 농담처럼 이야기를 꺼내셨다. "저는 한나라당에서 하겠다는 탄핵을 국회에서 물리적으로 막지 말라고 했는데, 막는 바람에 152석이 된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 안 막았으면 180석 정도는 나왔을 것 같은데요.(일동 웃음) 역사적 가정이라서 정확하게 계산을 할 수 없는 일이라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요!"

그날, 대통령은 상당히 새겨들어야 할 내용으로 말씀하셨다. "나보다는 '우리', '작은 우리'보다 '큰 우리', 그리고 '닫힌 우리'보다 '열린 우리'가 대의명분이 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도움이 안 된다. 진실 이상의 전략은 없다. 명분과 실리를 존중하고 잘 모르겠으면 손해나는 쪽을 선택하라"는 깊이 있는 충고를 해주었다.

총선 이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기에 그날 입당을 축하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 만찬에선 사회를 보던 김부겸 의원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여성 당선자와 중앙위원들에게 노래를 시켰다. 권양숙 여사와 함께 노사연의 '만남'을 불렸다. 또 이광철의원은 오페라 풍으로 '마누라송'을 불려서 배꼽이 빠지게 만들었다. 대통령은 조용필의 '허공'과 앙코르로 '부산갈매기'를 반주 없이 불렸다. 그리고 젊은 우리들은 청와대 역사에서 최초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불렸다. 그 뒤에 조중동 보수언론들은 이 일을 호들갑을 떨면서 보도하여 집권당의 오만함을 나타나는 징표로 만들기 위해 난리 부르스를 쳤다.

노무현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 2007년 1월 27일 12:00

2007년 1월은 집권당으로써 중요한 결정적 시기였다. 열린우리당이 분당이 되느냐? 아니면 임시로 봉합하고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2006년에 비상위원회에서 결정한 중앙위원회 해산 결정이 1월 16일, 법원에 의해 가처분을 받아서 전당대회소집이 무효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위원인 나를 포함한 '참여정치실천연대'가 완강하게 '기간당원제' 사수를 명분으로 전당대회를 저지하고 있었다.

전당대회로 간다는 것은 당을 선도탈당할 사람들에게 탈당하지 못하게 하여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것을 말하고, 전당대회가 무산된다는 것은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시나리오가 예상되고 있었다. 나는 '합의 이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열린우리당을 탈당할 사람들을 붙잡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탈당한 정동영을 비롯한 탈당파가 하나의 당을 만들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소위 '친노파'끼리 대선후보를 선출하여 '후보 단일화'를 통한 대연합을 추진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억지로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대통합을 하는 것은 해체될 당을 시한부 생명으로 연장하는 것으로 결국 당을 안락사 시키게 된다고 봤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에 대통령께서 참정연 국회의원들을 먼저 불려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뒤에 차례로 강경파 중앙위원들을 청와대 사저로 불려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치적 동지로 토론한 처음이자 마지막 토론이었다. 그날은 간단한 한식과 동동주 한잔씩 주셨다. 그 자리에 권여사도 함께 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는 현직 대통령은 여러 개의 늪을 통과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정치자금의 늪, 지역주의의 늪, 언론 검증의 늪, 경제 살리기의 늪, 차기 후보의 차별화의 늪 등입니다. 이 중에서 제일 가슴 아픈 것은 차별화의 늪이지요. 지금 열린우리당이 처해 있는 현실이 이 늪을 통과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대의가 중요하다고 말해왔는데, 이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종합적인 사고가 중요하지요"

같이 간 중앙위원들 중에 강경한 입장에 있었던 우리들은 "대통령께서 좋게 마무리하시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업을 다 이룩하지 못하면, 아들 중에서 남아있는 가업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문제의 결정을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이 분당이 되든, 통합체제로 가든 대통령께서 지금 결론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젊은 혈기만으로 뭉쳐있는 우리들이 못내 걱정이 되는지 차분하게 흐름을 따라 줄 것을 권유했다.

이틀 뒤, 29일 김근태 비상위원장이 주재하는 중앙위원회에서 기간당원제 폐지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탈당 사태까지 몰고 왔던 당헌, 당규 개정안이 가볍게 통과한 것이다. 기립해서 투표했는데, 63명의 중앙위원 중 62명이 찬성표에 일어섰다. 단 1명이 반대표에 기립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노무현의 가치를 똑바로 보아야 진보의 길이 보인다

내 마음의 한편이 불편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하면서 완전히 같이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불편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노무현의 정치적 실패를 기본 전제로 각종 추도의 글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추도의 글을 올리고 있는 마당에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정치가 실패했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추도사를 올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무현 배신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시대정신을 노무현 대통령이 배신한 적이 없다. 2002년 시대정신인 '민주화의 제도적 문화적 완성'을 향해 함께 했지만, 노무현의 당선으로 그 목표가 자동으로 성취되어 버렸다. 역설적으로 목표의 성취가 당선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밤새 민주주의의 축제를 즐기고, 2003년 부터는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일상의 실리를 위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과거의 일로 치부해 버렸다. 노무현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진보개혁세력의 분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명분에 집착하고 있는 낡은 진보세력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행진에 동참하지 않고 낡은 레코드를 틀고 있었을 뿐이다. 역사적 흐름에 따르는 진보개혁의 분화를 배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낡은 수구세력임을 자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연구소 김대호 소장에 따르면 정치하는 인간의 유형에는 제사장 유형과 제왕적 유형이 있다고 한다. 제사장 유형은 가치와 철학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반면에 제왕적 유형은 권력과 실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현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으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사람으로 다수의 정치인은 대체로 제왕적 유형에 속한다. 가끔씩 제사장 유형의 정치인이 나타난다. 가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원리원칙대로 살기 때문에 답답한 유형이라 인기가 없다.

그러나 이들이 있어야 정치에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끔씩 제왕적 유형보다 제사장 유형이 폭발적 인기를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 중에 하나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정치 기술적 영역에서 세밀하고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이끌어간 청와대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지난 3개월 동안 우리 사회디자인연구소에서 평가한 '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에서 많은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의 큰 흐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가고자 했던 '새로운 진보'의 길을 정확하게 볼 때, 한국사회의 미래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다리가 되셨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새로운 진보'의 다리를 밟고 용감하게 미래를 개척하라는 것이다.

- 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봉하마을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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