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핸드폰으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산본에 있는 리영희 선생님 댁에 들렀다가 서재 책상 위에서 발견한 돋보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그가 책 위에 돋보기를 놓고 깨알같은 글씨를 읽어내려가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커다란 렌즈에 나무 다리 3개를 스카치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 만든 독서용 돋보기. 노학자의 식지 않는 학구열과 지식인으로서 세상을 직시하려는 탐구욕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지방선거와 '리영희 돋보기'
2010 지방선거를 향한 레이스가 시작된 지난 2일, 저는 리 선생님 댁에서 본 그 돋보기를 다시 한 번 떠올렸습니다. 앞으로 4개월 동안 수천, 아니 수만 명의 후보자들이 3800여 석에 달하는 크고 작은 '시민대표석'을 차지하려고 유권자들을 향해 한 표를 호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후보를 골라야할까요? 돋보기를 들이대고 정밀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의 개인적 욕망과 탐욕만을 자극해 한 표를 얻으려는 일부 후보들에게 또 다시 우리의 풀뿌리 정치를 4년동안 맡기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MB정부와 여당인 한나라당은 세종시 수정안과 4대강 사업을 강행하고 있으며, 광우병 촛불과 시국선언 교사들을 탄압했습니다. 또 전 국민에게 TV로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미디어법 날치기를 감행했고, 용산참사…. 이 모든 것이 일당 독주라는 '오만의 정치'가 연출하고 있는 참극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현실은 더욱 심각합니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직후 당선 현황을 보면 한나라당 소속 광역단체장은 12명(열린우리당 1명, 민주당 2명), 기초자치단체장은 155명(열린우리당 19명, 민주당 20명)입니다. 광역 의원은 비례대표 포함 557명(열린우리당 52명, 민주당 88명), 기초의원은 비례대표 포함 1621명(열린우리당 630명, 민주당 276명)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주민들의 혈세로 호화판 청사를 짓고도 이들은 떳떳합니다. 어린 학생들의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도 '친서민'이라고 우깁니다. 주민의 눈높이에서 생활자치를 구현해야할 공복들이 중앙의 패거리정치에 몰려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전혀 작동될 수 없는 한나라당의 독주에 파열구를 내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낼 재간이 없는 팍팍한 현실. 따라서 이번 6·2 지방선거는 안하무인격인 일당 독주에 대한 심판이자 전복이어야 합니다. 또 대대손손 이어온 지역의 부패한 토호 권력을 시민권력으로 교체하는 분기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공동체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유권자들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진보싱크탱크들이 제시하는 희망의 정치 '어젠다10'
오늘부터 2달여간 <오마이뉴스>는 창간 10돌 기념 기획의 일환으로 국내의 11개 진보싱크탱크들과 공동작업한 결과물인 '지방선거 10대 어젠다'를 선보입니다. 이번 기획에 참여하는 단체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 생활정치연구소,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27, 생태지평 연구소,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좋은정책포럼, 코리아연구원,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한국미래발전연구원, 희망제작소 등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이 단체들과 수차례 회의를 해 사회 각 분야별로 구체적인 핵심 이슈를 선정했습니다. 또 공동기획에 참가하는 각 단체 인사들은 필진으로도 참여할 예정이며, <오마이뉴스> 상근기자와 시민기자들의 협업을 통해 지방선거 전까지 이슈화시켜나갈 예정입니다.
우리는 이 기획을 통해 퇴행적인 풀뿌리정치의 현주소를 실랄하게 고발하고, 지역 정치가 지향해야할 가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예정입니다. 필요하다면 이번 지방선거에 임하는 진보진영의 공통공약이 되기를 희망하며, 유권자들이 이를 활용해 풀뿌리민주주의의 역군을 고르는 데 참고서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삽보다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
영국의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농촌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순한 양들이 인간을 먹어치우고 있다.'
양모 가격이 폭등하자 귀족과 성직자들은 그들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작료에 만족하지 않고 농경지를 양을 키우는 목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소작농들은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협박 때문에 땅을 팔고 집을 떠나 떠돌다가 도둑으로 전락하고 결국 사형을 당하는 사회의 구조적 현실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500년 뒤인 대한민국에서는 양이 불도저와 포크레인으로 대체됐을 뿐 그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발의 삽날에 찍혀 망루로 올라간 철거민을 경찰특공대가 폭력진압해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해 강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주검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탐욕의 정치'가 빚어낸 참상입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이번 기획의 모토를 '삽보다 사람'으로 정했습니다. 중앙정치 위주의 거대담론보다는 고용, 복지, 교육, 주거, 환경, 행정 등 각 분야에서 자치단체들이 실현할 수 있는 주민 삶과 밀접한 생활정치의 과제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그간 진보의 대안을 각 분야에서 연구하고 축적해 온 국내 싱크탱크들이 이번 기획에 흔쾌히 참여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지금도 현실을 탐구하고 있는 리영희 선생의 커다란 돋보기를 유권자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이 깨어있는 일꾼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실천하는 시민이 주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정치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10.02.05 11:03 | ⓒ 2010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은 오마이뉴스 기자입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서 응원해주세요^^ http://omn.kr/acj7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