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의 '긴 밤 지새운' 결단을 보며

등록 2010.05.30 18:16수정 2010.05.3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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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여간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풍경이 차마 믿기지 않아서 더러 내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여러 차례 눈을 부벼 다시 찬찬이 살펴보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은 정말 초능력을 가진 마술사이다. 모든 풍경을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그 시절로 순식간에 되돌려 놓았다.

'북풍'이 세차게 불어 선거는 실종되고 없다. 대부분의 뉴스화면에는 온통 북풍한설만 가득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에 후원금을 냈다는 이유로 교사들은 다시 거리로 내쫒길 판이다. 보수신문과 방송은 앵무새처럼 정부 입장만을 되뇌고 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찰과 그들의 집회장 주변에는 무전기를 장착한 요원들이 어슬렁거린다.

공영방송 사장이 '큰집에서 쪼인트를 까이고'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고발을 남발한다. 마음에 안 드는 문화예술인들은 생업을 빼앗아 버린다. 조금이라도 정부와 다른 생각을 하면 '친북'이라고 가차없이 빨간 페인트를 쏟아붓는다.

1986년 '금강산 수공작전'을 아시나요?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싶어 돌아보니 거기, 1980년대 그 흉악무도한 풍경이 겹친다. 1986년 이른바 '금강산댐 수공작전'을 기억하는가? 때는 바야흐로 대학가의 젊은 사자들의 포효가 하늘을 찌르고 김근태, 권인숙등 고문사건이 줄을 잇고 수사기관과 감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즈음이다. 수사기관으로 간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들은 계속 늘어났다.

민청련, 민통련, 민교협, 민가협 등 '민'자 돌림 재야단체들은 강제로 사무실이 폐쇄되고 간부들은 모두 투옥되거나 수배됐다. 그해 10월말에는 건국대를 점거농성한 1200여 학생들을 세계사법사상 초유로 몽땅 구속했다. 전두환은 점점 코너로 몰리는 중이었다.

그때 전두환 일당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건곤일척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금강산댐을 건설하는 북한이 여차하면 수공을 감행해 서울이 물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모든 언론사를 상대로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기사의 크기. 방향. 논조, 형식까지 시시콜콜 지시하는 이 문건을 폭로한 기자들은 교도소로 갔다.


방송3사와 대부분의 일간지는 앞다투어 이에 순응했다. 곡학아세하는 학자들이 추임새를 넣어 63빌딩의 반까지 물에 잠기는 시뮬레이션을 선전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평화의 댐' 성금은 대기업은 물론 코흘리개 아동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돼지저금통을 허물어 납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누구도, 그 어떤 지식인도 의문을 말하지 못했다. 바로 마녀사냥 인민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선술집에서 소주를 나누며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파시즘의 광기가 생명을 위협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작 울분에 겨워 내뱉었다. "씨바, 지금이 을지문덕 살수대첩 시대인가."


이 희대의 사기극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김영삼 정부의 감사원에 의해 그 사기의 전모가 드러났다. 실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 아니던가? 진실은 힘이 세다. 권력자가 지하동굴 깊숙이 파묻어도 스스로 성장해 언젠가는 지표를 뚫고 솟아오른다.

금강산 댐 사기극 이후 24년 지난 오늘, 우리는 그때 그 풍경과 매우 유사한 풍경을 다시 목격하는 중이다. 왜일까? 무엇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군사정권과 한솥밥을 먹는 무늬만 언론일 뿐 한식구와 다름없는 거대 언론의 대중 조작에도 속지 않고 가까스로 '민주정부' 10년을 출범시킨 위대한 국민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이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국민의 명령은 지엄하지만 단순하다. 힘을 하나로 모으라는 명령이다. 지난 몇 번의 재보선이 이를 말해 준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특히 진보를 꿈꾸는 우리에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환심을 사야 하는 '돌아앉은 연인'이다. 나는 정말 국민에게 잘 보이고 싶다. 예쁘게 보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심상정 후보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심상정 후보가 전격 사퇴했다. 그녀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지난밤을 번민의 깊은 수렁에서 배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새벽 희미한 여명을 마주보고 결단했으리라.

나에게 심상정은 젊은 날 한때에 가슴 설레는 로망이었다. 1980년대에 그녀는 수사기관의 촉수를 따돌리며 긴 잠행을 했다. 그러면서 할 일을 유유히 해내는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숱한 사람들이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요원들에게 직간접으로 시달렸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녀의 그 용기와 지략에 감탄했다. 그 치열한 헌신에 내심으로 갈채를 보내면서도 주눅이 들었다. 도덕적 열패감에 시달렸다. 실로 그녀는 불세출의 용기와 지략을 겸비한 투사였다. 그런 그녀가 의사당에 진입하던 날, 나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잠시 황홀했다.

심상정 후보는 이후의 행보에 있어서 오늘 이 단일화로 인해 여러 장애물과 난관에 부닥칠 지도 모른다. 명석한 그녀가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단했다.
거짓말같이 1980년대로 되돌아가버린 이 시대의 광기 앞에 그녀는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이 서슴없는 미친 질주를 막아서는데 자신의 몸을 도구로 쓰기를 작정한 것 같다.

1990년대 김대중 대통령이 어느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가장 감동적인 일로 소위 '위장취업'한 대학생 집단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들이 신분을 낮추어 몰래 노동현장에 들어가 사는 일들을 보고, 듣고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이타적일 수 있는지 스스로 아득해졌다. 간난신고를 이겨내는 신념의 힘이 얼마나 강고하고 아름다운지, 그 끝이 어디메쯤인지 사뭇 경이로왔다.

내가 유치원 다니는 아이 둘 가진 여성으로서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심상정과 같은 경이로운 집단에 대한 마음의 부채를 얼마간 갚으려는 데서 비롯했다. 6월항쟁의 성공으로 인해 잠시 짧은 징역을 구경하고 나오고 나니 그 부채감이 조금 덜어지는 듯했다.

나는 1980년대의 수많은 심상정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언젠가는 꼭 이들의 이야기를 대서사극으로 형상화해 보고픈 작가적 욕구를 아직도 갖고 있다. 그렇고 그런 남루한 내 삶의 가장 소중하고 진정한 가치로 남아 있는 꿈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로 인하여 유시민 등과 심상정들은 현재 각기 다른 정파로 분립해 있다. 이 절대다수 '보수의 나라'에서 각자 분립해 있는 진보의 앞날은 참으로 위태로워 보인다. 온갖 신산고초가 예정되어 있는 듯도 하다.

진보는 그 사회의 수준과 환경에 따라 가변적인, 그러나 분명하게 가치지향적인 개념이 아닌가 싶다. 지금 2010년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진보는 무엇일까? 민간독재화하고 있는 이 정권의 역주행을 막아내는 것보다 더 화급한 과제가 있을까? 그것은 심상정 등이 온갖 간난신고를 거듭하는 중에도 지속적으로 부여안고 있는 꿈, 진보정치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과제가 아닐런지?

심상정의 '긴 밤 지새운' 번민이 풀잎마다 알알이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결실이 되기를 하늘 우러러 기도한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을 피해 곧은 신념과 헌걸찬 실천을 함께 했던 유시민과 심상정은 다시 어깨 겯고 함께 나아가기를!

그때의 어둡고 험하고 구불구불했던 오솔길, 그러나 연대와 배려로 아름다웠던 그 구부러진 오솔길이 '민주정부' 10년의 대로로 이어져 있었음을 부디 다시 마음에 새겨 주기를!

덧붙이는 글 | 유시춘씨는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며, 유시민 경기도지사 야권단일 후보의 누나이다.


덧붙이는 글 유시춘씨는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며, 유시민 경기도지사 야권단일 후보의 누나이다.
#유시민 #심상정 #단일화 #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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